*좀비 아포칼립스
*우울장애 묘사
*자해 묘사
*텍스트 혐오
초대
“사영아, 이게 벌써 4번째다.”
이사영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낮고 작은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씹어뱉었다. 들으나 마나 빌어먹을 집구석 욕이나 하고 있을 게 뻔하다. 배원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막 냉장고에서 가져온 달걀을 내밀었다. 맞은 게 왼쪽이라 얼마나 다행이야. 물론 이사영이 때린 쪽은 지금 팔 한쪽이 성치 못해 깁스하고 있다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원우는 그 무뢰한보다는 이쪽에 더 마음이 쓰였다. 저 성질머리 못 이기고 언젠가 고운 얼굴 상할 줄 알았지. 파랗게 멍이 든 왼쪽 눈가 주변을 시원한 달걀로 마사지하던 이사영이 대뜸 물었다.
“그 새끼 갔어?”
“네가 보냈지. 입원실로.”
“안 간 걸 보니 별로 안 아팠던 모양이네…….”
“억지야. 남우진 씨가 환자는 절대 안 보내는 거 알면서 그러냐.”
“그 새낀 인성도 말아먹었으면서 환자 앞에서만 착한 척이야…”
그 ‘착한 척‘ 아니었으면 너도 이 병원에서 눈 뜬지 하루만에 아웃이었어……. 소신 발언이 배원우의 혀뿌리를 간지럽혔으나, 한껏 가시가 흉흉하게 솟아오른 이사영에게 팩트를 내리꽂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알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식욕 앞에서는 선을 자주 망각하는 남우진과 섬세하기 짝이 없는 이사영은 영 안 맞았다. 지향점이라도 같았으면 또 몰라. 서원병원은 운영 방식에서도 둘은 극과 극을 달렸으니, 한쪽은 쇄국을, 한쪽은 우호를 꿈꾸었다. 여기서 이사영은 반문한다. 저 망할 독재자는 두 눈 씻고 봐도 저랑 깔이 비슷한데 무슨 웃기지도 않는 사마리아인 흉내를 내고 앉았단 말인가?
하늘 아래 두 태양은 없다고, 부동의 권위자로서 남우진이 지키고 서 있는 한 이사영은 영영 성질을 죽이며 살아야 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어울리는 이사영의 성질머리로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솔직하게, 배원우는 그가 머잖아 서원병원에서 뛰쳐나갈 줄 알았다.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은 애였다. 대부분이 말 한마디 나누기 전부터 슬금슬금 꺼리게 만드는 얼굴과 포스를 가진 배원우한테 초면부터 이름 석 자 뱉는 깡이나, 선 얇은 곱상한 얼굴로도 사람 기를 죽이는 흉흉한 기세, 타고난 말본새 따위가 그렇다. 남우진은 이 싹수 노란 애새끼를 두고, 서원병원의 기념비적인 첫 예외를 만드느냐, 마느냐를 수십 번도 더 고민했다.
“이번엔 또 왜 쥐어팼는데, 응?”
“같잖은 게 말 좆 같이 하니까.”
“그거… 네가 할 소리냐. 사영아.”
“그딴 거 백날 찾아보래, 찾아지나 보자고.”
……제대로 긁혔구나! 배원우는 신께 섬세함의 달란트를 한 톨도 못 받은 탓에 데여도 데여도 눈치가 부족하단 평을 들었으나, 이쯤 되니 입 다물 타이밍 정도는 안다. 그는 기민하게 이 금쪽이에게 무고를 선고했다. 원래도 어화둥둥 어르고 달랠 아픈 손가락인데, 변명까지 기가 막히게 주어졌으니 나무랄 수가 있나. 상대측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보내는 바이다. 운이 안 좋았다.
사실 저쪽이 정론이다. 이사영이 찾아다니는 사람을 어떤 특정 인물이라고 지칭할 수는 있나? 비유하자면 40대 여성, 혹은 남성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다. 개인이라기보다는 집단에 가까운 조건이었다. 그걸 병적으로 묻고 찾아다니는 것이다. 말은 안 해도, 일종의 강박장애란 걸 서원병원에 속한 모두가 다 알았다.
이른바 ‘좀비 바이러스’가 몰고 온 인류 괴멸의 위기는 짧고 굵게 사람들을 치고 지나갔다. 독이 바짝 올라 까칠하기 그지없는 사람도 여기저기 까보면 상처투성이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친절을 베풀 여유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가늘고 긴 숨을 뱉어낸 사영이 등받이를 쭉 젖혀 등을 기댔다. 연갈색 달걀이 흐릿하게 뭉개진 채 시야를 한가득 메웠다.
“아이 하나, 노인 하나, 청년 하나?”
“어르신께서 다리가 안 좋으시대.”
“그럼 환자만 받으면 되잖아. 애는 아빠가 보라 하고.”
“아빠 아니래. 애는 할머니 손주 맞는데, 남자는 생판 남이라던데.”
“근데 왜 같이 와?”
“난들 아냐. 뭐 또 기구한 사정인 갑지.”
기구한 사정으로는 빠지지 않는 사영이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이곳은 자기랑 영 안 맞았다. 사영은 제 살 깎아 남 위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제 사람이 그런 짓 하는 것도 두 눈 뜨고 못 본다. 잔소리나 들을 게 뻔하니 더는 입 밖으로 내지 않게 되었지만, 표정까지 꾸며줄 배려심은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로 말해요‘ 실력이 늘었다.
’서원병원‘은 남우진 하나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단한 백신을 만드신 명의시니 반기를 들 수가 있나. 남우진 본인도 은근히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면이 없잖아 있는 데다가, 심지가 타기 시작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그 성정도 한몫했다. 다행히 서원병원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순수하게 뜻과 지향점이 같아서 그런 경우도 많고, 타고난 성질이 순종적인 경우도 있었다. 사영처럼 둘 다 아닌 인간은 진즉 못 버티고 서원병원을 뛰쳐나갔다.
여간 답답한 게 아닌 듯, 긴 한숨을 뱉으며 종이를 덮어버린 사영이 소파에 파묻히듯 몸을 밀었다. 싹, 다, 마음에 안 든다. 사춘기는 오래전에 지났는데, 요즘 들어 이 망할 집구석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만 갔다. 배원우가 불안한 눈으로 눈치를 살피다가, 사영이 방금 덮어버린 종이를 손에 들었다.
“그래도 애 오면 분위기 확 살잖냐. 나 요만한 애 보는 거 언제 일인지 기억도 안 나.”
“이미 보고 왔어?”
“방금 복도 돌아다니던데, 같이 온 남자랑.”
“오자마자 제집처럼 구네…….”
긴 다리를 꼬고 발목을 까딱이던 사영이 비릿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성격파탄자와 적지 않은 시간 함께한 배원우의 촉이 말하건대, 이것은 쌈닭의 본능이 살아난 얼굴임이 틀림없다. 좀 상태 멀쩡한 ’생존자’가 들어오면 십중팔구 이사영과 한 판 붙고 왕창 깨진 뒤 짐 싸서 나가는 게 서원병원의 순리였다. 배원우는 본능적으로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문을 다 메울 정도로 큰 덩치의 배원우가 그러고 있으면 위압감을 느낄 만도 하건만, 사영은 나른하게 웃으며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비켜.”
“사영아, 뭔가 불안하다.”
“패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패면 환자니까 받아줘야 해서 안 패는 거잖아, 너.”
“으응, 그렇지.”
사영은 앞에 선 배원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몇 번 붙어봐서 아는데, 배원우를 힘으로 이기기란 쉽지 않다. 서원병원에서도 손꼽히는 피지컬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얼굴 보고 말 섞어야 하잖아. 좀 지쳐서……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데, 안 돼?”
대신 그는, 세상이 멀쩡했으면 아이돌을 했을 얼굴로 천사처럼 웃어 보였다. 게다가, 그런 핑계라니! 배원우는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이 배은망덕한 새끼는 저를 부모는 개뿔 형으로도 안 여긴다지만 제 눈엔 자식새끼 같은 놈이었다.
“너 진짜 패면 안 돼.”
“그래.”
“말로도 패지 마라.”
“알았다니까.”
내려간 가드 사이로 손쉽게 빠져나온 사영이 복도 쪽을 살폈다. 뭔가, 어수선한 것도 같고. 그야 새로운 사람이 합류하면 인사 나누느라 병원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묘했다. 뭐랄까, 지금까지 봐왔던 것보다 좀 더 들뜬 기색이다. 배원우 말대로 애가 들어와서 그런가. 하긴, 가장 어린 윤가을도 내년이면 성인이니 아이가 그리울 만도 하지. 이사영은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 건지 전혀 공감이 안 되었지만.
서원병원 복도는 초심자가 탐방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 좀비가 한창 유난일 적에 막은 곳도 많고, 새로 낸 샛길도 많다. 따라서 양옆은 물론이요, 위, 아래로도 구조가 전혀 달랐다. 도면을 외우지 않고서야 발이 쉽게 안 떨어질 텐데, 무슨 생각으로 첫날부터 애까지 달고 헤집고 다니는지.
사영은 아무런 표시도 되어있지 않은 평범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팻말은 없지만 거기가 창고D다. 창고D의 구석진 부분의 오른쪽 벽에는 반대편에서 천으로 막은 구멍이 대문짝만하게 뚫려있는데, 거길 지나면 다른 동으로 넘어갈 수 있다. 대충 그런 구조였다.
짝, 짝, 손바닥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삼촌. 우리 방에 안 가?”
“하은아. 삼촌이 길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랬지?”
“절대 어디 가지 말고, 제자리에서 기다리기. 사람 왔다!”
쎄쎄쎄를 하던 여자애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사영을 가리켰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남자가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청량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쪼그려 앉은 자세에도 불구하고 대강 짐작이 가는 훤칠한 키. 앳된 얼굴.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눈매와 곧은 콧대, 약간 칙칙한 톤의 창백한 피부. 목을 다 덮는 검은 목티와 슬랙스, 단정한 차림.
“……안녕하세요.”
약간 낮은 감이 있는 미성.
누군가를 이렇게 꼼꼼히 관찰하는 건 처음이래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이것을 관찰이라고 부를 수 있나. 순간적으로 모든 감각이 뿌리째 끌려가는 느낌. 이 넓은 세상에 조금씩 나누어주어야 할 관심을, 오롯한 개인에게 독점 당하는 감각. 그 와중에도 사영의 눈은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기 바빴다. 의식이 멍하다. 두개골 안이 과도한 업무로 인해 마비된 사무실처럼 굳었다.
“저기요?”
남자가 눈앞에 대고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딱 붙는 핏의 목티 소매가 엄지가 시작되는 볼록한 언덕까지 올라와 있다.
“야.”
“야?”
“아, 죄송해요. 넋이 나가셨길래.”
남자는 뻔뻔한 얼굴로 손을 거두고, 옆에 있던 애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이는 상당히 어색한 손길에도 불구하고 꼼질꼼질 몸을 움직여 야무지게 편한 자세를 잡았다.
“저, 길을 잃어서 그런데, 혹시 로비 가는 길 좀 여쭐 수 있을까요? 잠깐 둘러본다는 게 그만.”
시작 지점이 로비였나. 그럼 방도 안 배정받은 주제에 막 돌아다녔단 거 아냐. 새로운 환경에 떨어지면 경계심 때문이라도 몸을 사리기 마련인데, 그에게 그런 상식은 없는 모양이었다. 길을 잃어놓고도 태평하게 애랑 마주 앉아 손장난이나 하는 모양새가 상당히 범상찮다.
“정신 나갔네…….”
고의는 아니었다. 이리저리 시비 털고 다니던 옛 버릇대로 입이 움직였을 뿐이지. 사영은 원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인상을 와락 찌푸린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표정이 알기 쉬운 사람이다.
| Q. 사지 멀쩡한 사람이 서원병원에 기어들어 왔다. 이때 사영이 취할 올바른 반응을 고르시오. |
| 1. 꺼져. |
| 2. 닥쳐. |
| 3. (길을 안내해준다.) |
“……따라와.”
배원우가 알면 기절초풍할 소식이었다.
*
“미친 거냐?”
남우진은 퍽 친근한 투로 그를 대했다.
“진료 보는 그새를 못 참고 튄 줄 알았다. 저 망나니 새끼는 어디서 만나서 달고 온 거야? 벌써 한따까리한 건 아니겠지.”
“망나니 새끼라니, 말이 심하네….”
“오는 사람마다 족족 내쫓길 바쁜 놈이 어딜 입을 열어!”
울컥해서 그렇게 소리쳐놓고, 남우진은 슬쩍 남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설마. 눈치를 보나. 그 남우진이? 덩달아 이사영도 슬쩍 남자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동요 없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짝다리를 짚고 선 것이 은근히 껄렁대는 포즈다. 조카를 할머니한테 보낸 이후로 내내 저 꼴이었다.
가늘게 내리뜬 채 서원병원 로비를 훑던 시선이 서서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주 느긋한 태도였다. 실제로 동작이 느린 거였는지, 사영만 그렇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시선이 기어 오는 동안 사영은 제게 잔소리하는 남우진을 가볍게 뒷전으로 밀어 두고 그에게 주목했다.
서슬 퍼런 시선이 이사영의 얼굴에 꽂히고, 보기 좋은 모양새의 얇은 입술이 달싹였다.
‘너, 나중에 보자.’
“나중이랄 게 있나.”
“-뭐?”
“남우진, 너한테 한 말 아니고.”
사영이 남우진을 훌쩍 지나쳐 다가오자, 남자는 그에 맞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나 보폭의 크기가 다르다. 방금보다는 확실히 가까워졌다. 사영이 나긋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인 뒤 조곤조곤한 어조로 속삭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지금 듣게. 할 일도 없는데.”
빈정대는 말투를 듣자, 새파랗게 날이 벼려진 눈빛에 순간적으로 열이 올랐다. 힘을 줘 꼿꼿하게 편 손가락이 사영의 이마를 콕, 눌러 밀어냈다. 가격에 가까웠다. 사영이 맞은 이마를 감싸고 물러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노호한 음성이 로비를 꽉 메웠다.
“어린 놈의 새끼가, 어른 말하는데!”
올해로 만 37세, 어른, 남우진이 이마를 짚었다.
*
이사영이 혼났다.
아니, 대체 어느 위인이 그를 혼낸단 말인가? 배원우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당장에 그를 찾아갔다. 근 8년간 미루고 미뤄왔던 제 새끼의 예의범절 교육을 믿고 맡길 선생의 등장인지도 몰랐다. 방으로 찾아간 첫 번째 도전은 허탕이었으나, 서원병원 고인물인 배원우나 이사영쯤 되면 초심자가 길을 잃는 구간은 눈 감고도 짚어갈 수 있었다.
차의재는 복도에 쭉 늘어진 창틀에 팔을 괸 채 허탈한 얼굴로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멍한 시선이 유리창 너머, 서원병원의 담장 안쪽으로 빼곡하게 세워진 바리게이트를 훑었다. 입술에 걸친 흰 사탕 막대가 잘근잘근 씹힌 자국으로 이리저리 휘어있다.
“…어. 그, 죄송합니다. 길 좀 여쭐 수 있을까요……”
“아이고, 예. 길이 좀 어렵죠. 방 찾으세요?”
“아뇨. 남우진 씨 사무실이요….”
차의재는 물고 있던 사탕 막대를 대강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던지는 폼이 퍽 익숙한 게 상습범이다. 저거 나중에 나가서 치워야 하는데. 배원우는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집 없이 떠돌이 생활하는 사람이 대체로 그랬다. 장소를 소모품으로 취급한다. 주변에 전혀 정을 붙이지 않는, 뿌리 없이 살아온 사람들 특유의 버릇이었다. 꼴을 보니 여기서도 얼마 안 있다 갈 사람 같아서, 배원우는 굳이 잔소리하지 않았다.
“남우진 씨랑 친하신가 봐요.”
“아. 예전에 여기 잠깐 살았었어요.”
“예? 언제요?”
“그, 10년 좀 더 됐나?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눈에 익은 곳이 없네요.”
“싹 잊죠, 그 정도면. 지도 드릴까요? 여기 위험한 곳도 좀 많아서요. 감염자 격리실 같은 곳에 들어가시면 사고니까요.”
차의재는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요. 금방 길 익히겠죠.”
“오. 전혀 아닐 텐데요.”
필터 없이 돌아온 부정에 차의재가 물끄러미 배원우를 돌아봤다. 시선에 담긴 뜻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배원우는 사람 좋게 웃으며 서원병원 개조공사의 역사를 A부터 늘어놓으며 훌쩍 앞장섰다. 남의 표정을 살핀다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인간 같다. 차의재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젠가 넘었던 바리게이트, 앉아서 시간을 죽였던 건물 디딤판, 그 앞에 있을 녹슨 철문 따위를 떠올린다. 먼 과거를 더듬는 눈빛이 흐렸다.
*
차의재는 서원병원에 쉽게 녹아들었다. 그는 주로 남우진의 사무실에 가 있거나, 조카와 함께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곤 했다. 요즘 같은 초저출산 시대의 슈퍼스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데다가, 싹싹하고 말 잘 통하니 겉돌 이유가 없었다.
“또 길 잃었구나. 맞죠?”
싹싹하고, 말이 잘 통한다. 그가 고분고분하고 상냥한 사람이라서? 아니. 사영이 보기에 차의재는 그런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쉽게 욱하고, 화도 잘 못 참고, 타고났는지 은근히 남을 찍어누르는 기세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냥, 워낙에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니 주눅 들 일이 많아서 굽히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심하게 대책 없는 성격이었다.
그래도 겨우 일주일 남짓 본 사람을 어떻게 그리 짐작해 단정 짓느냐고 하면, 이사영이 그에게 지나친 관심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실토할 수밖에 없다. 숨길 것까지도 없었다. 사영은 그냥 대놓고 의재를 쫓아다녔다. 한평생 얼굴 볼 일 없었던 사영이 의재를 따라다닌답시고 제 사무실에 얼굴도장을 찍기 시작하니, 남우진은 없던 화병이 생길 지경이라며 치를 떨었다. 자연스레 의재는 그의 사무실에 발걸음하는 일이 줄었다.
“……너 때문 아니냐?”
“내가 뭘요?”
“네가 맨날 옆에서 내비 해주니까 안 외워지잖아.”
“그럼 맨날 데리고 다니면 되죠.”
“너 이런 성격 아니라며.”
“누가?”
“……여기저기서.”
짐작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영은 두 번 안 물어보고 넘겼다. 더군다나 제 생각에도 요즘 자신은 보통 이상하게 구는 게 아니었다. 말 나오고도 남지. 다만 이사영은 사르르 웃으며, 악의 한 점 없는 척 무해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웃는 얼굴로 사람 꾀는 건 사영의 전매특허였다. 유채현이 평하길, 느리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욕지거리나 뱉는 게 독뱀이 따로 없다나. 전방 150m에서 식별 가능한 수준으로 나대는 꼴을 보면 넌 장수말벌이렷다, 하고 받아치니 새로 받은 별명에 걸맞게 아주 길길이 날뛰더라. 동갑내기 둘이서 유치하게 잘 놀았다.
“개새끼.”
“…….”
“낯선 사람 오면 왈왈 짖고 물고 지랄해서 쫓아낸다고.”
“남우진이?”
“들어보니까 너 남우진 씨보다 10살도 더 어리다며? 말본새가 그게 맞냐?”
“그쪽한테는 존댓말 해주잖아요.”
“내 말이. 나한테는 왜 존댓말 쓰는데?”
“그쪽이 해달라고 하니까.”
이사영이 존댓말 하래서 고분고분 어미 늘리는 놈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너도나도 이사영한테 존댓말 듣고 살았겠지. 명백한 특별 취급이었다. 의재는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유, 안 물어봐요?”
“피곤해.”
아무래도 그는 이사영이 진저리 나도록 싫은 모양이었다. 서원병원 대표 쌈닭으로서 너무 많은 미움을 받아본 이사영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왜? 차의재가 여기 온 이래, 적어도 이사영이 생각하기로는, 자신이 그에게 심술을 부렸던 적은 없다. 오히려 다시 없을 친절한 태도로 그를 대했는데, 저만 보면 고양이 마주친 쥐처럼 피하려 드는 게 이상했다.
“방 좀 데려다줘.”
싫은 티는 다 내면서, 저 좋을 대로 막 써먹고. 그는 사영이 저한테 무른 것을 넘어 관대한 수준이란 걸 알고 나서는 부려먹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래봐야 길 찾기, 하은이 맡기기, 정보 물어보기 수준의 사소한 부탁이었으나, 차의재가 타인에게는 좀처럼 손을 벌리지 않는 성격임을 고려하면 이 역시 특별 취급의 일종이었다.
사영은 군말 없이 앞장서서는, 차의재가 저를 따라 한 발짝 내딛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물었다.
“나이는?”
“안 질리냐?”
벌써 몇 번이나 한 질문이었는데, 이사영은 질리지도 않고 또 물었다. 아마 어떤 진상이 꼭꼭 숨겨져 있다고 믿는 모양인데, 차의재 입장에서는 한사코 발뺌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 올해 연도에서 생년월일 빼면 28년이 된다. 그럼 스물여덟 살이지, 뭐야. 일단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다. 동안이라 손해 봤다며 웃어넘기기도 하루 이틀 일이지, 이 정도로 집요하게 이어지니 슬슬 두려웠다. 이거 다음에 뭐 물어보더라? 아예 싹 선수를 치고 빨리 해치울 생각으로 의재는 주절주절 입을 털었다.
“가족 없고, 길치 아니고, 남우진 씨랑은 오래전에 알았던 사이고, 붕대 감은 사람 못 봤고.”
“……마지막은 물어볼 생각 없었는데.”
젠장. 차의재는 저만치 시선을 피했다. 이건 전적으로 이사영 탓이다. 사람 손 안 타는 고양이 같은 놈이 이례 없이 자꾸 치대니, 차의재는 어딜 가나 그의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이사영이 말하지 않은 이사영의 정보도 알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의 ’강박’에 관해서는, 모두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길 망설였으니 되려 기억에 남았다.
너 없는 곳에서 너 얘기 했다고 대놓고 말한 격이 됐으나, 차의재는 동요한 티를 싹 감추고 최대한 뻔뻔스레 되물었다.
“너 그 사람 찾아다니는 거 아니었어?”
맞긴 했다.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탈이지. 열 번 찌르면 아홉 번은, 다른 특징이 없느냐고 되묻는 말이 돌아왔다. 단서라곤 그거밖에 없는 사영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8년씩이나 그런 경험을 하면, 슬슬 지쳤다. 반쯤 버릇이 된 질문이었다. 처음 본 사이에나 물어보지, 그 이후로는 또 한참 잊고 살았다. 그러고 보면, 차의재에게는 물어본 적이 없던가. 처음 그를 찾아간 표면상의 이유도 그것이었는데, 첫인상이 워낙에 강렬해서 물어보는 걸 깜빡했다.
8년간 이어온 강박적인 버릇을 잠깐이나마 망각했었다는 충격도 잠시, 사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못 봤다고?”
보통은, 봤다. 라는 대답이 돌아오는데. 세상이 너무 살만해졌나. 사영이 의뭉스러운 눈으로 훑어보자, 약간 표정이 굳은 의재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하은이랑 할머니 만나기 전엔 사람을 못 보고 살아서.”
“혼자 다녔단 것처럼 말하네. 요즘 세상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세상이 지나치게 살만해진 게 맞는 모양이다. 사영은 이제 아예 저만치 멀리 시선을 유기한 채 모른 체 하는 의재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짧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제정신 아닌 줄은 알아봤지만, 도대체 이런 인간이 바깥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 8년 전 서원병원에서 눈을 뜬 이후의 기억밖에 없는 이사영이지만, 병원 밖이, 그리고 서울 밖이 아직은 흉흉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여러 번 반복된 호구조사에서 알아낸 바로는 지방에서 올라왔다고 했는데, 혼자 다녔단 말도, 지방에서 올라왔단 말도 사실이라면 생각보다 생존력이 강한 모양이었다.
하긴. 어디 박혀서 살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차의재는 좀처럼 남에게 아쉬운 소릴 안 한다. 짐짓 편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명백히 선을 긋는 태도였다. 말이 잘 통한다는 것도, 예의 바르단 것도 전부 철저히 사회생활을 위해 뒤집어쓴 가면에서 나오는 태도였다. 그렇게 벽을 치는 성격이면 어느 무리에서든 마음 편히 지내지는 못하겠지.
“너도 바깥에서 10년만 살아봐. 어찌저찌 살 만해져.”
이 홀대가 밉지 않은 것은 그래서일지도.
사영은 불퉁한 표정으로 창밖을 살피는 옆모습을 관찰했다. 햇빛을 받은 얼굴이 창백하게 반짝였다. 낯빛도 그렇고, 남우진 사무실을 들락날락하는 꼴도 그렇고, 처음에는 어디 아픈 줄 알았건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것을 보면 그냥 타고난 피부톤이 그런가 싶다. 그게 아니면,
“감염된 적 있어요?”
그간의 호구조사에 없었던 새로운 질문이다. 차의재는 살풋 미간을 찌푸리더니, 못 들을 걸 들었단 표정을 한 채 사영을 돌아봤다.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이사영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나는 있어서.”
“……멀쩡하네.”
“별로요. 어쨌든, 감염된 적 없단 거죠.”
“없어.”
“그럼 얼굴색 안 좋은 건 원래 그래요?”
“햇빛 못 봐서 그래.”
그런 식으로 창백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사영은 더 캐묻는 대신 말을 아꼈다. 오늘 아낀 질문은 내일 쓸 핑계로 좋았다. 사영은 원래 목표지향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계단식으로, 차근차근, 계획은 본디 그런 식으로 세워야 한다. 한 번에 너무 큰 목표를 세워서는 달성하기 어렵다.
그 이후로는 평화로웠다. 차의재의 방까지는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이었다. 남우진이 제게 내어준 1인실 병실 앞에 선 의재는 방에 들어가도 되냐고 기어오르는 사영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가 병원에 온 첫날에 맞았던 이마가 떠올라서, 사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뺐다.
쫓아온 손가락은, 서늘하고 딱딱했다. 굳은살이 가득 박인 손이 오른쪽 눈 아래 뺨을 만지는 듯, 스치는 듯, 훑고 지나갔다.
“여기?”
사영은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입천장에 달라붙던 혀를 의식하게 되듯, 오른쪽 눈꺼풀 아래에서 잊고 있었던 이질감이 느껴졌다.
“금방 찾네. 알고 있었어요?”
“사시인 줄 알았지.”
“아하……. 그럴싸하긴 한가 봐. 장인인가 뭔가가 만들었다더니.”
흰 손가락이 눈꺼풀 아래로 파고들어 의안을 굴리자, 의재가 기겁하며 손목을 잡아 내렸다.
“왜요. 보고 싶어지지 않나?”
“됐거든!”
그 반응은 평범한 사람 같았다.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너 대체 누구를 기다리는 건데, 하고 물어보면 사영은 대답할 말이 없다. 사실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말하기에도 우습다.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대상은 없고 기다림만이 남아있었다. 인생이 바닥에 못질 당해, 옴짝달싹도 못 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듯한 무력감. 그의 인생은 계속 그랬다. 눈을 뜬 순간부터 줄곧, 서원병원에 갇혀있는 삶이었다.
물론 그가 정말로 병원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갔다는 말은 아니다. 평범하게 산책도 하고, 마트나 편의점도 다녔다. 임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 다 좀비 밭이었어.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 줄 알아? 그렇게 말하는 배원우를 두고 훌쩍 앞질러 가기도 하고.
떠나는 걸음은 무겁고, 돌아가는 걸음은 지나치게 조급하다. 이사영이 어딘가에 묶여있다는 것은 속도의 차이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렇게 애타게 걸어서 서원병원의 앞문에 도착하고 나면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겨울밤이었다고 한다, 문을 부술 듯 거세게 처대는 소리에 잠에서 깬 유채현이 불같이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었다가, 팔이 묶이고 재갈을 문 채 바닥을 기는 좀비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지.
오른쪽 눈에 붕대를 감은 좀비는 이상하게 온순했더란다. 생김새도 멀끔한 것이 꼭 누군가가 키우다 버린 짐승 같았다. 생각해보면, 좀비도 어떤- 하찮고 짧은 사고회로를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었으므로, 잘만 훈련시키면 길들일 수 있겠지. 좀비 사태 발발 3년 만에 백신이 개발되었지만, 좀비를 인간으로 치료하기보다는, 움직이는 사람 시체를 길들여 네크로맨서 따위를 하고픈 별종 내지는 또라이도 있지 않겠는가. 서원병원 사람들은 막연하게 이사영이 그런 기괴한 취향의 주인을 가졌었던 모양이라고 짐작만 했다.
그러니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개가, 주인과 마지막으로 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서원병원을 떠나지 못하니까. 그것도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이사영이 그러고 있으니 안타까움은 두 배가 되었다. 불행배틀로 메달을 가린다면 서원병원에서 금메달을 따갈 인물은 두말없이 이사영이었다.
사영은 진심으로 진저리났다. 온 동네 아픈 손가락 취급당하는 것도, 줄 묶인 개처럼 살아가는 것도.
참을 수 없이 서원병원을 떠나고 싶은 날이면 그런 꿈을 꿨다.
물속에 잠긴 듯 뭉개진 시야와 먹먹한 소음. 외곽선이 흐릿한 검고 하얀 무언가가 흔들리듯 움직이고, 머리카락을 누르는 천의 감촉, 뺨을 쓸어내리는 손, 무언가가 속삭이는 소리. 그러나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시 한번 말해봐, 그렇게 말하려고 입을 열면 웅얼거리는 소리가 입술 새를 겨우 비집고 빠져나갔다. 당연히 못 알아듣겠지. 시야 속의 모든 게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췄다. 그것이 사영을 바라본 채 굳은 것이다. 이사영의 시야 속에는 그것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이 멈추자 세상이 멈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은 제 눈에 붕대를 다 감아주고 나서도 흰 뭉텅이를 거두지 않는다. 하얗고 얇은 선이 유연하게 시야를 몇 번이고 가로지른다. 빙글, 빙글, 어떤 점을 중심으로 나선형을 그리는 궤적. 감고 있는 거야.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 같은 머리는, 아주 오랜 관찰 끝에서야 한심하리만치 단순한 결과를 도출해낸다.
붕대를 감고 있는 거야.
몇 번이고 반복된 관찰, 몇 번이고 함께한 시간, 몇 번이고 꾸었던 꿈.
그 안에 그가 있다. 이사영의 인생을 옭아맨 줄은 새하얗고 얇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폭의 나약한 끈이었다.
수백, 수천 번 그려온 재회였다. 그 지지부진한 상상 속 자신은 분명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좀 무심했던 것 같다고,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당신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고, 이마저도 변명에 불과하지만, 당신에게 미안한 건 사실이라고 전하고 싶었다. 그랬었다.
그러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듯한 이목구비가 눈에 밟히는 순간, 남우진의 굳어버린 사고와 몸은 11년 전 그날로 순식간에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에서 방금 막 걸어나온 사람처럼, 앳된 느낌의 곱상한 남자애가 청년의 표정을 흉내 내며 남우진 앞에 도래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현상에 남우진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성장이 멈춘 건가? 그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군.”
그쪽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차의재는 그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틀린 생각도 아니어서, 남우진은 그 짜게 식은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모르겠다,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아쉬움만 남는 이유를.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인생을 사는 건 어렵기만 했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고 숨 가쁘게 달리고 나도, 뒤를 돌아보면 가벼운 엿처럼 구멍이 송송 뚫려있었다.
남들 다 부러워하는 사자 직업을 달고 나니 세상이 망했다. 크게 유감은 없었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다 보니 저절로 가지게 된 직업이지, 딱히 가지려고 아등바등 노력해본 적이 없어 그랬다. 남우진의 인생은 아쉬울 것 없이 굴러갔다. 남들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학문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연인처럼 애틋하고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무언가였다.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감정. 사랑을 훌쩍 뛰어넘는, 집착.
말도 안 돼. 좀비라니, 웃기는 소리 마시길. 세상이 저를 두고 몰래카메라라도 찍나. 남우진이 충격을 받은 포인트는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갓 취업한 병원이 망했다는 게 아니라, 평생 판타지, 헛소리로 취급할 줄 알았던 허구의 존재가 세상에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수많은 천재가 어떠했던가? 미지의 존재를 앞에 두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첫쨰, 패배감과 상실감이요, 둘째, 설렘과 호승심이다.
남우진은 텅 빈 병원에 자리를 잡고 백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여느 의사들과 달리 그는 이빨 자국을 단 환자가 찾아오면 버선발로 맞이했다. 대체로 죽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남우진은 그들이 이성을 잃을 때까지 표본과 실험 결과를 얻다가, 그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인간성을 상실하고 나면 인도적인 끝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간혹 그들과 함께 왔던 애인, 친구, 가족이 병원에 남았다. 생존에 썩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환경은 열악하고, 물자는 부족하고, 세상은 가혹했다. 남우진은 기로에 서 있었다. 사람을 버리느냐 마느냐의 기로가 아니었다. 누구를 버리면 좋을까 하는 기로였다.
“예에, 뭐. 몸 상태가 이렇다 보니까요.”
살짝 건들건들한 티가 묻어나는 말투였다. 감정이 좋을 리가 없지. 어쩌면 좀비 발발 직후의 그가 지나치게 유순했던 걸지도 모른다. 남우진에게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듯, 사람은 난관 앞에서 자주 자신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 어쨌거나 저쪽에서 적당히 꼿꼿이 굴어주니, 남우진은 죄책감을 조금 덜었다.
“듣기로는 아직 진료 보신다던데, 아시는 분이 다리가 좀 아프셔요.”
“같이 오신 할머니?”
“네. 애도 한 명 있는데, 걘 아픈 데 없고요…. 아무튼, 여기서 좀 머무르게 해줬으면 하는데.”
“안 될 리가. 여기 말고, 윗선에 연락해서 근처에 집을 한 채 구해줄 수도 있지. 국가유공자나 다름없는 몸이신데.”
“예?”
멍한 시선이 돌아왔다. 아직 나라 사정을 잘 모르나. 하긴, 혼자서 고립된 삶이었다면 소식이 한참 느릴 만도 하다. 남우진은 어렵게 풀어낸 문제를 자랑하는 듯 조금 들뜬 마음으로, 그가 누리게 될 것과 개선된 세상을 설명하고자 문장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아. 아뇨. 저는 좀 있다가 도로 갈 거예요.”
“……어디로?”
“일단 다시 세종시로 가려는데요.”
“제정신이냐? 서울까지 왔다가 도로 내려가는 놈이 어디 있어?”
꽤 오래 만류했던 것 같다. 신약 개발의 가능성과 서울의 안전함, 그가 받을 보상에 대해 떠드는 동안 시큰둥하던 그는, 같이 왔다는 아이의 정서적 안정까지 들먹이고서야 몇 주 더 있다가 가겠다고 대답했다. 겨우 몇 주! 달달 볶아 얻어낸 보람이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촉박했다. 반쯤 해탈한 남우진을 앞에 두고 머쓱한 듯 뒷덜미를 쓸어내리던 의재가 물었다.
“저기, 근데 혹시 몇 년 전에 여기 남자애 하나 오지 않았어요?”
“몇 년 전에, 남자애 하나? 우리 병원에 하루에만 몇 명이 찾아오는지 아는 거냐?”
“아, 들었어요. 그…… 혹시 저 때문은 아니죠?”
“아니겠냐!”
목에 핏대를 세운 남우진이 소리치자, 차의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하란 뜻은 아니었는데. 뭐, 좋은 게 좋은 건가… 남우진이 손해 본다고 해서 마음이 상하지는 않으니까. 굳이 이제라도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서원병원 같은 곳이 필요했다.
“아무튼, 이만한 키의 좀비였는데.”
“차트만 뒤져도 그런 애가 다발로 나올 거다.”
가늘게 숨을 뿜어내며 분노를 삭이던 남우진이 매몰차게 단언했다. 의재의 설명이 지나치게 모호한 탓도 있었다. 정확한 키도 아니고, 손날로 대강 표시한 높이와 성별, 몇 년 전 찾아온 좀비라는 아리송한 설명까지. 서원병원에 오는 환자 대부분이 감염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특정 불가능한 단서였다.
“어린애였으면 잘 치료하고 청소년보호소 같은 곳으로 보냈겠지. 오면서 보지 않았냐? 서울은 오래전부터 소강상태다. 굳이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
“그렇네요.”
시원스레 대답한 것 치고는 쓸쓸한 얼굴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이다. 남우진은 그게 못내 눈에 밟혀서, 그날 밤 내내 진료기록을 뒤졌다. 예상한 대로 너무 많았다. 3년 전 서류까지 뒤졌던가, 서류 뭉치는 벌써 한 손으로 다 쥘 수도 없을 만큼 두꺼워져서, 남우진은 몇 시간 내내 눈이 빠지도록 골라내던 종이들을 서랍에 처박아버렸다. 이런 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남우진은 오랜만에 연구실에 불을 켰다.
차의재는 이사영이 싫었다.
남우진이 그를 욕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서원병원에 돌아온 직후의 차의재는 우진에 대한 감정이 빈말로라도 좋진 않았으므로, 그의 평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서원병원 사람들이 그를 피하라고 일러줘서? 글쎄, 듣는이의 시점에서는 단어의 선택이나 표정에서 드러나는 화자의 애정이 보이기 마련이다. 이사영을 피하라고 조언하는 얼굴들은 뭐랄까, 우리 애가 낯을 많이 가리니 잘 부탁해요, 그런 말을 하는 얼굴이라서, 차의재는 되려 도대체 왜 그들이 이사영을 싸고도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서원병원에서 길을 잃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 복도 막는다고 내가 판자에 못질 존나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근데 내가 왜 이쪽으로 왔지. 이게 옮겨진 건가? 아니, 복도가 움직였을 리가.
낡고 헤진 기억 속 서원병원과 현재 장소가 꽤 다르단 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하은의 손을 붙잡고, 깊은 곳까지 들어온 후였다. 하는 수 없이 의재는 하은과 쎄쎄쎄나 하며 시간을 죽였다. 그는 이제껏 아이에게 길 잃으면 어디 가지 말고 제자리에서 기다리라고 세뇌하다시피 했다.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번, 두 번, 손뼉을 맞부딪힐 때마다 불안이 커졌다. 박하은이 사람 왔다며 벌떡 몸을 일으킬 때 속으로 얼마나 안도했던가.
그러나, 그 시선.
사람의 얼굴 가죽은 물론 그 아래까지 뜯어볼 것처럼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 어느 욕심 많은 까마귀가 가장 사랑하는 보물을 깃으로 품은 듯, 짙고 깊은 그늘에서 미동도 없이 그를 향하던 관찰. 세밀하게 쪼개진 보랏빛 홍채의 틈 사이에서 번뜩이던 기묘한 열기.
숨길 것 없이 떳떳한 몸이었다면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살아본 게 너무 오래전 일이어서 모르겠다. 차의재는 이사영이 불편했다. 불편한 사람이 불편하단 티를 내도 자꾸 쫓아오니 싫었고, 남한테 그렇게 싸가지 없다는 놈이 자신한테만 입안의 혀처럼 굴며 나긋나긋하게 대하니 마음 편히 싫어할 수 없어서, 그게 또 싫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마음에 든다는 점이었다.
느긋하게 좁혀오는 거리도, 벅차지 않게 조금씩 꾸준하게 내리는 관심도, 이 서원병원에서 편히 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란 점도 좋았다. 누구를 마음에 둬서 좋을 거 하나 없는 인생인데.
어느 밤, 하은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 가면 안 돼?”
서원병원은 따스했다. 언젠가 느꼈던 건조한 우울은 온데간데없이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하다. 차의재가 오래도록 찾아 헤맸던 것들이 이곳에 있었다. 가족이, 사람이, 대화가 여기 있었다.
“안 된다니까.”
첫 만남부터 줄곧, 하은은 성가시지 않은 아이였다. 모든 유아는 본능적으로 보호자의 관심과 사랑을 유도하는 방법을 안다. 숨이 넘어가라 울고, 바락바락 악을 지르고, 종종 자학적 행동마저 일삼는다. 반면 박하은은 어디까지나 적당히 귀찮게 굴었다. 보호자가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선 안에서만 고집을 부렸고, 행여 기분이 상하여 보호자의 범위 밖으로 벗어나더라도 멀리 가지 않는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안전하게 반항했다. 아마 이 애는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주 보호자인 할머니의 체력을 고려하면, 이건 어린 박하은이 익힌 생존 스킬이었다.
차의재는 하은이 의젓한 척 구는 게 싫었다. 철없이 울고 떼쓰는 게 어울릴 나이였다. 그는 자꾸만 물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일부러 더 단호한 척했다. 나도 여기 있고 싶어. 그 말이 자꾸만 혀끝을 맴돌았는데, 어리광을 부릴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어리광, 언제 부려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런 귀여운 짓은 아무리 늦어도 성인 되기 전에는 졸업해야지. 차의재는 어영부영 성인이 됐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움직이는 시체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뒤집혔다. 그 후로는, 뭐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잠바 주머니 안에서 담배갑을 굴리다가, 하은이 주려고 챙겨뒀던 막대사탕을 꺼냈다. 흡연자라고 하니까 남우진이 담배를 주긴 했는데, 라이터를 못 받아서 불이 없다. 겨우 몇 달 끊었는데 이렇게 도로 피고 싶지도 않고.
병원 옥상의 담장 폭은 한 뼘만 하고, 높이는 차의재의 가슴께까지 올 정도로 높았다. 낙상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든든히 설계한 거겠지. 이 위에 걸터앉아 한가로이 발을 구를 미친놈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봄에는 밤이 깊어도 기온이 퍽 쌀쌀하지는 않다. 미온한 밤이 퍽 어색했다.
“뭐해요, 추운데.”
직접 겪은 건 꽤 오래전 일이지만, 본래 서울 토박이인 차의재는 서울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는 추운 축에도 안 낀다. 세상 예쁘게 생겨선, 평생 등 따스운 병원에서만 자라서 모르지, 네가. 차의재는 입 안에서 성가시게 존재감을 발하는 사탕을 콱 물어 반쪽 낸 후 대답했다.
“너 내 스토커야? 어떻게 알고 찾아와.”
“그쪽이 조심성 없는 거겠죠. 동선이 뻔히 보이게 움직이잖아요.”
“내가?”
“문 열고 다니는 꼴만 봐도요. 궁금한 건 뭐가 그렇게 많아서 자꾸 아무 데나 다니는지 모르겠네.”
순간, 섬찟 소름이 돋는다. 문을 열고 다니는 건 버릇이 맞다. 그거 때문에 고초를 겪은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끝까지 고치지 못했다. 애당초 차의재의 생존은 수렵채집에 가깝다. 식량이나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편의점을 가더라도, 갔던 곳을 또 가면 현저하게 물자가 줄어있으므로 최대한 피해야 했다. 파밍이 끝난 장소는 문 열고 나오기. 좀비 아포칼립스 세상의 생존자라면 척, 하면 척, 하고 알아듣는 표시였다.
근데 그 버릇을 여기서도 못 죽였다고? 사탕 파편이 입안을 따갑게 찔렀다. 길지 않은 침묵 뒤에 사영이 대수롭지 않단 듯 말을 이었다.
“격리실 문은 문틀이랑 잘 안 맞아요. 일부러 아래쪽 경첩을 부숴놨거든요. 모르는 사람이 열었다가, 엉성하게 닫으면 티가 나게끔. 혹시라도 안에 있던 격리자가 탈출했을 시에는 복도를 지나다니다가 문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 말은, 열려있진 않았단 거지?”
“으응, 닫고 나왔던데요. 문도 내가 정상적으로 잘 닫아놨고요.”
“안에 그분 잘 계셨고?”
“응.”
“너 이거 또 누구한테 말했어?”
“아무한테도요.”
“나한테 이걸 왜 얘기해주는데.”
“약간은 고마워해 줬으면 해서?”
차의재는 그제야 물고 있던 사탕을 잘게 부숴 넘겼다.
“별걸 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막대를 질겅질겅 씹다가, 사탕 포장지를 든 손을 담장 너머로 쭉 내밀었다.
“손.”
그 순간, 폭이 두꺼운 손이 허벅지 위에 얹힌다. 차의재는 팔을 어정쩡하게 거둬들인 채 제 허벅지 위에 놓인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얇은 손금이 시원하게 가르고 지나간 손바닥이 달빛을 받아 희멀겋게 빛났다. 쭉 펴니 손가락 끝부터 엄지 뿌리까지 길이가 제 허벅지를 다 덮을 듯 컸다. 가지런히 모은 네 손가락이 일자로 곧다. 저마다 다른 높이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관절이 얇게 뻗쳐 올라간 어린 대나무의 마디를 연상시켰다. 잠시간 얌전히 기다리던 손바닥은 차의재가 가만 저를 바라보고만 있으니, 직접 움직여 사탕 껍질을 가져갔다.
“배원우가 그쪽 아무 데나 쓰레기 버린다고 그러더라고요.”
“……아. 미안. 진짜 고의는 아니었다고 전해줘.”
“거짓말.”
“진짜야. 버릇돼서 그래.”
“흐응……, 버릇이구나. 집을 자주 옮겨 다녔나 봐요. 안전한 곳 한 군데서 되도록 오래 머무르는 게 편하지 않나?”
차의재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너무 늦었다. 침묵이 대답이 되는 때였다. 사영은 남색 밤 아래, 실루엣만 간신히 분별이 되는 고개 숙인 옆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기도 금방 떠나겠네요.”
묘하게 서운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어쩐지 죄인이 된 느낌이라, 의재는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불퉁하게 되물었다.
“뭔 상관이야.”
“애랑 할머니는 어쩌고요. 각별한 줄 알았는데.”
“각별해. 가끔 찾아온다고 했어.”
“왜요?”
“왜긴 왜야. 가족이니까 그러지.”
“왜 가족처럼 여기냐고.”
“시비 터냐?”
언제 주눅 들었냐는 듯 금방 끓어 톡 쏘아붙이는 투에, 사영은 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쪽, 남우진한테도 그러죠. 별로 사이가 좋아 보이지도 않은데, 같이 있으면 되게 편해 보이거든. 왜일까. 전에 여기 살았을 때 뭔가 대단한 사이였나?”
“…….”
“사귀었어요?”
“미쳤냐?”
“으응, 그럼 다행이긴 한데, 또 납득이 안 가네.”
“납득을 하고 안 할 게 어딨어. 그냥……”
차의재는 제 어금니 아래서 납작하게 눌린 사탕 막대를 끄집어냈다. 이게 금연에 도움이 되나? 몇 달이나 멀쩡하게 금연 중인 입장이 할 말은 아니지만, 차의재는 제 금연의 9할은 박하은의 공이라 쳤다. 담배가 좀 아른거리다가도 올망졸망한 아이 얼굴을 떠올리면 태울 마음이 싹 가셨다. 날 더워지면 하루에 두 갑씩도 피워대던 담배를 딱 끊은 건 하은이 만나고부터였다.
“……걔가 날 삼촌이라 부르니까, 가족처럼 지내는 거지.”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만난 지 몇 달도 안 됐다. 사실 가족이라 부르기엔 웃기는 사이다. 박하은이 아직 어려서 쉽게 저를 의지하고 따르지만, 선 안에 들어가는 게 쉬웠던 만큼 잊히는 것도 쉬울 것이다. 어린아이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컸다. 쌓이는 무게가 큰 만큼 아래 눌리는 기억은 금방 납작해진다. 차의재가 이대로 서원병원을 떠나면, 몇 달이나 더 기억해주겠나.
오밤중에 왜 옥상에서 청승을 떠나 했더니, 결국 이런 뉴스였다. 박하은의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표정이 쓸쓸히 가라앉았다. 앳된 티가 남은 얼굴로 사춘기 딸이랑 한바탕 싸운 마냥 쓸쓸한 표정을 하니까 영 안 어울렸다. 이상하게 순순히 대화에 응하는 태도도 그렇고.
차의재는 의안에 대해 알아낸 그 날 이후로 태도가 묘하게 유해졌다. 누굴 동정하나, 지금. 원래 같으면 씹어 죽일 듯 굴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오직 그 대상이 차의재이기에 이사영은 관대해졌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이사영은 차의재의 걱정이 싫지 않다. 왜냐하면 당신의 걱정은 다정하다는 말이 안 어울릴 정도로 무미건조하다. 기껏해야 물건을 건넬 때 중심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내미는 정도의, 이사영쯤 되는 인물이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변화밖에 없었다. 여느 사람이 그러하듯 곤란한 얼굴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당신이라서. 나는 아마도 당신이라서, 많은 걸 허락하고 내어주게 된다.
“호칭을 중요하게 여기나 봐요……. 그럼 내가 그쪽 형이라고 부르면, 나도 보러 와줄 거예요?”
사영은 미약한 기대감을 품은 채 돌아보는 뒷모습을 감상했다. 뒷머리는 직접 자른 듯 수평이 살짝 안 맞고, 목젖까지 올라오는 긴팔 목티는 얇고 타이트하다. 옷의 재질로 보아 추워서 입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면, 늘 저런 목티를 입고 있지. 손목을 다 덮도록 끌어올린 소매 하며, 패션인가. 그런 걸 챙길 사람인가?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안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난감함이 느껴지는 얼굴이 보인다. 그는 정말로 표정에서 생각이 잘 드러났다. 28살이라니, 웃기는 소리. 그 나이 먹고도 이렇게 사회생활이 서툴 수 있나? 사영은 제 추측에 근거 한 줄을 더 붙이다가, 한 줄 띄웠다. 단순히 사회 경험이 적어서 그렇다기엔 태도가 애매하다. 이사영이 관찰한 바, 타인을 대하는 차의재는 남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고, 가끔은 돌연 헌신적으로 굴었다. 둘 다 자각하지 못하는 듯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런 게 익숙한 사람처럼.
“왜요? 형이라 부르는 거 싫어요?”
그야 그렇겠지. 반응을 보아하니 그 호칭의 무게를 아는 모양인데, 부담스럽고 싫은 게 당연하다. 주변에 입 가벼운 사람이 너무 많았다. 하기야 떠들 화제가 너, 나, 우리밖에 없는 이 재미없는 세상에서 무슨 얘기를 더 하겠냐만은.
가라앉은 시선이 너 대체 무슨 꿍꿍이냐고 묻는 듯하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건대 사영에게는 별다른 속셈이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을 뿐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8년을 귀히 아껴온 그 단어를 만난 지 며칠도 안 된 남에게 줘버리겠는가. 그러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알아서 불러.”
“그래요, 형.”
“…….”
미친 거지. 사영은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고 웃었다. 왜일까. 당신 하나 놀려먹겠다고 가볍게 소비할 단어가 아닌데, 이딴 식으로 써버린 것에 후회 한 점 들지 않았다.
사실, 후회할 이유가 없다. 이사영은 이 순간을 8년 동안 기다려왔다. 기다리지 않을 순간을 기다려왔다. 모르는 누군가를, 혹은 자신의 체념을 기다려왔다.
“내려와요. 방 데려다줄게요.”
지 볼 장 다 봤다, 이거지. 차의재는 등 뒤로 성큼성큼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다가, 고개도 안 돌리고 대답했다.
“나 길 다 외웠어.”
“아직도 다 못 외웠으면 좀 심한 거 아닌가.”
“안 데려다줘도 되니까 먼저 가라고.”
“나까지 가면 여기서 혼자 뭐해요.”
뭐하긴. 너 오기 전처럼 추억팔이하면서 청승이나 떨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 5분 뒤의 미래가 암울해서, 차의재는 훌쩍 담장에서 내려왔다. 이사영이 멀지 않은 곳에서 우뚝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차의재는 형 소리를 어떻게 얻어냈느냐, 기왕 ‘형‘이 되셨으니 애한테 예의범절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되겠느냐, 하는 배원우의 원망 섞인 읍소에 한참 시달렸다. 누굴 바둑학원 선생인 줄 알아. 하기야 내가 보는 애 성질이 저 꼴이면 나 같아도 어디에 호소를 해보겠다면, 호소 당하는 입장이 되고 싶진 않았다. 하은이 정도로 말랑말랑한 아이면 몰라, 심지어 이건 다 큰 성인 아닌가.
“형, 머리 나쁘단 얘기 자주 듣지 않아요?”
이것 봐. 이렇게 기어오르는데 예의범절을 가르치긴 개뿔. 요새 좀 붙어 다녔더니, 이젠 아주 그냥 편한가 보지. 의재는 팔을 움직여 제 어깨에 걸치는 턱을 밀어낸 후 대답했다.
“너한테 처음 들어.”
“거짓말 진짜 못하는 거 알죠.”
“넌 진짜를 말해도 구라라고 우기잖아.”
“대체로 더 말해보라고 자극하는 건데.”
“…….”
“알면서 당해주는 줄 알았더니.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쉽겠어요.”
많이 당했다. 차의재는 망각의 심연에서 기어오르는 쓰라린 기억을 도로 집어넣었다. 뺏긴 건 별로 안 아까웠는데, 누군가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파서 잊고 싶었다. 그냥 달라고 그러면 되는데 굳이 그렇게 상처를 남기고 가지.
그렇게 서글프게 매듭지어서 다시 풀지 않게 되는 걸까. 풀어서 곱씹었더라면 더 외로웠을까? 쓰고 떫은 맛에 혀가 무덤덤해지듯 고독은 견딜수록 익숙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나 같은 성격이 사기를 많이 당하는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넌 계속 여기서 살았다며.”
“여기 살면 안 당하는 줄 알아요? 아마 여기가 제일 위험할걸.”
의재는 순간 남우진의 착잡한 얼굴이 떠올렸다. 솔직히, 그 옛날에 뭐라고 말했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기껏해야 사람 좀 돕고 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남우진이 거기에 왜 이토록 꽂혀서 전 국민에게 무상 보건센터 따위로 취급당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남우진이 남 돕는 게 적성에 맞았던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줄 알지만, 의재는 국가 스케일의 사고에 자신을 엮지 말아줬으면 싶었다. 서원병원이 보건소 취급당하는 거 끔찍이 싫어한다는 이사영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저라는 걸 알면 어쩌나.
어쩌긴, 인생의 교차점에서 잠깐 마주치고 헤어지는 흔한 인연 중 하나가 되는 거지. 기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긴 한가. 평생을 가족으로 함께하고 싶었던 이도 제 손으로 보내주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그런 꿈을 꾸는 건 너무 발전이 없는 거 아닌가.
“8년이나 여기 살았으면 너도 여기랑 성격 맞는 거 아니야?”
“……웃겨서 말도 안 나오네. 진심이에요?”
“……취소. 너 여기서 어떻게 사냐?”
“그러게요.”
그답지 않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옅은 체념이 담겨있다.
“사람 살리는 거 좋다니까,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그런 식으로 신경 끄는 데도 한계가 있지. 이쪽은 이쪽대로 제 살 깎아 도와주는 건데 그게 당연한 줄 아는 사람들이나, 기껏 도와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식으로 나오는 것들 보면 짜증이 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야 그렇지. 숱하게 겪어본 일이라 공감은 간다. 근데,
“네가 돕는 것도 아니면서 왜?”
“……형, 진짜 누구랑 같이 살아본 적 없구나.”
곱게 눈을 접어 웃으며 하는 말치고는 비뚜름했다.
“내가 아니어도, 내 주변인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으면 화가 안 나겠어요?”
그 순간, 사무치게 외로웠다. 좀 전과 다를 것 없는 공기가 왜 이리도 먹먹하고 요란한지. 방금 애써 밀어 넣었던 이별들이 깊게 찔린 상처처럼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덮쳐왔다.
잃은 건 아깝지 않았다. 상처도, 사실 예상했기에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다. 홀로 남아서 곱씹게 되는 게 문제였다. 함께할 때는 마냥 좋았던 일들이 송곳처럼 변해서 한 번 꺼내어 보기도 힘들어질 때, 그런데 함께할 사람이 없어 그 송곳 같은 사람들이라도 기억 속에서 꺼내와야 할 때가 너무 아팠다.
혼자란 건 그렇다. 내 인생이 비극이 되어도 울거나 화내주는 사람 하나 없고, 나는 그 비극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
“다음 주에 간다고 그랬던가.”
내 비극을 봐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이 인생이 희극이 되는 건 아주 오래전에 단념했으니, 대신 화내고 울어줄 사람이라도 있길 바랐다.
“나랑 같이 살아볼래요?”
그래서 차의재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춘몽
세상이 나를 존나 억지로 까는 듯한 날이 있다. 의재한테는 그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무슨 피해망상에 절어있는 소리냐 되물을 수도 있지만, 들어보면 사정이 참 기구하다.
아침부터 식은땀을 흘리던 놈은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그랬다. 그래, 야. 연습한 게 얼만데 뛰어야지. 너 아니면 누가 하냐. 친구들의 부추김에 놈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늘 뒤지는 한이 있어도 계주는 뛰고 간다.
빈말은 아니었는지, 놈은 무려 2등으로 결승선을 밟았다. 그러고는 운동자 바닥에 널부러졌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같은 반이니까 이름이나 아는 사이. 그렇지만 의재는 사람 하나 업고 보건실까지 달릴 체력이 됐고, 놈은 상태가 위급해보였다. 업어줄 사람은 제가 아니어도 많이 있었으나 겨우 그런 이유로 사람 돕길 망설이는 성격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딱 한 코너만 더 돌면 보건실이 나온다. 와, 이 새끼 생각보다 무겁네, 하며 자세를 고치려고 등에 업은 놈을 한 번 들썩인 순간이었다. 목덜미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격통, 하면 어느 정도의 통증을 떠올리는가?
차의재가 아는 가장 큰 통증은 초등학교 시절 나무를 타다가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졌을 때의 통증이었다. 그랬었다, 그날 전까지는.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고, 입에서는 아-, 하는 아주 약한 단말마가 날숨에 배어 새어나갔다. 몸에 공기를 가두려는 듯 기도가 문을 닫는다. 저절로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바닥과 충돌한 몸의 고통은 신경도 안 쓰인다. 통증이 시작된 부위를 보호하려는 듯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아픈 곳을 더듬었다. 그러나 의재의 손에 닿은 건 자신의 목덜미가 아니라, 타인의 머리통이었다.
물렸다. 사람이 사람을 장난으로 무는 수준이 아니었다. 개가 간식을 뜯어 먹듯 물었다. 쩍, 쩍, 경련하는 위턱과 아래턱 사이에서 넝마가 된 살점과 말캉한 핏덩이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뒤섞였다. 목이 아팠다. 물린 곳이 아니라 성대가 아팠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의재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숲속이었다. 손목과 발목은 각각 하나로 모아 묶인 데다가,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다. 거친 흙길 위에서 굼벵이처럼 기는데, 이상하게 아픈 곳은 없었다. 심지어 끈적거리는 목덜미도 아프지 않았다.
차의재는 3일 밤낮을 굴러 겨우 손목, 발목을 묶은 천을 끊어내고 재갈을 풀었다. 전부 같은 옷감이었다. 당시 차의재가 입고 있던 옷과 정확히 동일한, 체육대회용 반티.
먼 미래에 되돌아보길, 그건 아마 제 어린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처였으리라. B급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의 등장, 그것에게 목이 물린 채 의식을 잃은 친구. 그러나 사람을 죽일 용기는 없다. 막 고등학교에 올라온 놈들치고는 대처가 훌륭하지 않았던가. 친구 농사를 잘했던 모양이라고, 별 위로도 안 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현실이 지나치게 암울하면 사소한 것에서도 기적을 우기게 되는 법이다.
어쨌든 차의재는 미치지 않았다. 인간이냐 물으신다면 그건 대답할 수 없다. 좀비냐 물으신다면 그것 역시 대답할 수 없었다. 정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였으나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통각을 거의 상실했으며, 편의점의 삼각김밥 대신 사람을 앞에 두고 식욕을 느꼈다. 음식을 먹어도 쓰거나 떫은 맛만 났다. 그러나 다른 맛들을 아주 상실했느냐고 물으신다면, 역시 공란으로 두겠다. 사람을 먹어본 적은 없었으니까.
의재는 혼자 떠돌아다니는 삶에 익숙해졌다. 사람으로 남은 사람이 별로 없을뿐더러, 간혹 마주쳐도 의재 쪽에서 슬금슬금 피하게 됐다. 붕대로 칭칭 두른 목 덕분에 금방 의심을 받았다. 물린 자국은 회색빛의 이빨 자국만 남기고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아물었지만, 그 흉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뭐라고 해? 사실 물렸는데요, 근데 저밖에서 비척비척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랑 같지는 않아요…….
같지는 않아요, 그건 거짓말이잖아. 그래서 의재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안부 몇 마디 주고받고 깔끔하게 안녕을 고했다. 사무치게 외로웠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모르지, 단순히 감염 속도가 느린 걸지도. 어느 날 갑자기 돌아버려서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물어버리면 어떡해. 그래서 의재는 부모님께 한마디 말도 없이 집을 떠났다. 이제 겨우 17살 먹은 소년이 짊어지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결정이었지만, 어떻게든 버텨야만 했다. 버티지 않으면 깔려 죽는다. 짓눌리길 견디는 삶이었다.
살아남는 것에는 금방 익숙해졌다. 의식주야 뭐, 주인 없는 집과 상점이 즐비한 도시에서 문제될 게 없었다. 좀비들은 의재를 보고 달려들었지만, 의재가 반사적으로 내민 팔을 한 번 물어뜯고 나면 입을 몇 번 쩝쩝거리다가 헛구역질하며 돌아섰다. 팔에 수많은 이빨 자국을 만들고서야 겨우 알아내기를, 그것들은 피를 구분하는 듯했다. 사람 꼴을 보고 다가오다가도, 의재가 상처 난 팔을 휘휘 휘둘러 피 냄새를 풍겨주면 서서히 멈춰서다가 뒤 돌아 제 갈 길을 갔다. 알아낸 후로, 차의재는 부러 몸에 상처를 하나씩 만들어 달고 다녔다. 별로 아프지도 않고, 금방 나으니까. 썩은 내 나는 시체한테 과격하게 키스 당하는 것보다야 이게 훨씬 낫다. 팔이 길고 얇은 자상의 흉터로 얼룩덜룩해졌다.
우연히 만난 가난한 생존자 무리와 며칠을 함께했다. 일종의 등가교환이었다. 그는 외로움을 해결하고, 그들은 의식주를 해결 받았다. 좀비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차의재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움직이다 보면 헐렁해지는 붕대 사이로 드러나는 이빨 자국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연명에 급급하여 그를 반기던 눈빛들은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의심과 공포로 얼룩졌다. 몇 번의 비난과 몇 번의 예고 없는 이별을 겪은 차의재는 점차 떠나야 할 시기를 배웠다. 그렇게 점점 이별이 늘었다. 분명 외로운 게 싫어서 시작한 짓이었는데, 반복할수록 마음이 허해졌다.
‘서원병원’에서는 꽤 오래 머물렀다. 그야 평생을 책이랑 연필밖에 안 쥐고 살아온 것 같은 인간과 환자 서넛이 전부였으니, 눈에 밟혀서 떠날 수가 있나. 더군다나 그들은 의재에게 붕대나 이빨 자국에 대해서 질문하지도 않았다. 어딜 가나 우울의 습기가 눌어붙은 세상에서 그곳만큼은 건조했다. 오래전 울고 난 사람의 눈가처럼, 약간 뜨끈하고, 맥없이 말랑했다. 잃을 거 다 잃은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여기서 살 수 있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도, 사람을 마주치면 그런 희망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사람은 사람을 앞에 두고 맛있겠다고 여기지 않으니까.
떠나기 전에 남우진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언제 좀비가 될지 모르는 몸으로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았다고 욕을 듣거나, 당장에 나가라고 위협받거나 할까 봐서. 내일이면 안 볼 사람들이라도 그건 싫었다. 경계 어린 시선만으로 충분히 아팠다. 말로 벼린 악의를 굳이 겪고 싶진 않았다.
그런 공포를 깰 정도로 서로의 믿음과 정이 두터웠느냐면, 그건 아니다. 차의재는 사람 곁에 머무르길 원하면서도 살아있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은 꺼렸다. 알맹이 없는 안부나 몇 마디 나눌 줄 알지, 서로가 누구인지는 전혀 묻지 않는 사이였다. 그런 담백한 사이이기 때문에 그만큼 오래 함께할 수 있었다. 특히나 제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남우진과는, 어색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차의재의 입을 열게 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기대였다. 남우진의 백신은 겨우 몇 발자국을 앞둔 게 아닐까, 하는 기대. 지난 시간 동안 봐온 그의 연구는 좀처럼 진척이 없긴 했지만, 문외한의 짧은 견해로 내린 잘못된 추측이라 믿고 싶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의재의 목덜미며 팔을 살피던 남우진은 한껏 찌푸리고 있었던 미간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염치없는 줄 알지만……, 가기 전에 샘플을 좀 얻을 수 있겠나?”
오만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대답이었다. 진리니, 발견이니 떠들 때부터 정상 아닌 줄은 알아봤지만, 참.
“쌤 진짜 웃기는 사람이네요.”
너덜거렸다, 모든 게. 바싹 말라 쪼그라든 피딱지처럼. 남우진에겐 두 번 생각하고 말을 뱉을 여유가 없었고, 차의재에겐 매달릴 힘이 없었다. 너무 울어서 눈물도 남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먹고살 걱정이 없어져도 마음은 여전히 가난했다. 뒤늦게 제 짧은 언행을 깨달은 남우진이 표정을 굳혔으나, 차의재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사과받고 싶지 않았다. 상처받았단 사실 자체를 외면하고 싶었다.
“대신 배로 갚으셔야 해요. 도와달라는 사람 거절하지 마시고, 요즘 세상에 의사 노릇 해주는 사람 드문 거 아시잖아요.”
기대를 버렸다. 자신과 사람과 세상에 대한 기대를 죽이고 나니 되려 그런 무거운 말이 쉽게도 나갔다. 그늘이 드리우는 남우진의 얼굴을 보자, 산들바람 같은 유쾌함이 한 차례 지나갔다. 그 뒤로는 줄곧 암울한 상태였다.
병원 건물 실루엣만 봐도 마음이 먹먹해져서, 차의재는 서울을 떠났다. 생존자 무리를 찾는 것도 그만두고, 인적 드문 곳을 찾아 조금씩 자리를 옮겼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관계 단절을 향한 병적인 집착, 행하는 본인은 몰라도 명백히 우울장애의 증세였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있게 설계되지 않았다.
차라리 좀비가 되어 버렸으면 나았을까? 아아. 아니, 그건 좀. 그래도 역시 차의재는 사유하는 동물로 남고 싶었다.
분노를 퍼붓기 딱 좋은 희생양들이 거리에 만연한지라, 의재는 기분이 지나치게 안 좋은 날이면 애꿎은 좀비 하나 붙잡고 화풀이를 하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시체를 데려다 패는 것은 아니고, 차의재는 그런 폭력적인 사람이 못 되는지라, 주욱 그은 제 팔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입에 집어넣는 정도였다. 좀비는 웨엑, 게워내곤 비틀거리며 도망갔다.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직접 그은 팔도, 도망가는 좀비를 보는 것도, 자학에 가까운 행위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런 짓은 그만두었다.
어쩌면, 사람 비슷한 거라도 붙잡고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기인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과 교류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일 주, 이 주 정도면 말을 말아. 혼자 지낸 지 몇 달, 몇 년이 지나가자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뒤늦게나마 미쳐가고 있다는 자각이 어렴풋이 들었으나, 온갖 핑계로 부정했다. 혀는 굴러가는지, 성대는 기능하는지,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지, 기억은 멀쩡한지 따위를 점검하는 거야. 자고 일어나면 팔, 다리, 손가락을 움직여보며 몸이 말을 잘 듣는지를 확인하듯이. 그냥, 그런 거야. 이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가정은 조금도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시간을 떼우기보다는 정처 없이 도시를 떠돌아다녔다. 좀비들한테 투명 인간 취급당하는 게 싫어 팔을 긋는 걸 그만두었다. 좀비를 사람으로 착각하는 일이 늘었다.
여기 지금 나밖에 없나? 정말 이 넓은 도시에 나밖에 없는 건가?
모르는 학교 운동장의 조회대에서 주운 메가폰을 들고 도시를 돌아다녔다. 골목 사이사이에 숨어있던 좀비들까지 다 기어 나왔지만, 사람은 안 보였다. 그야 이쪽에서 메가폰 소리로 좀비 어그로를 끌었으니, 되려 반대편으로 도망을 치려나.
차라리 죽이러 와줬으면 좋겠다. 이딴 좆 같은 삶 1초도 더 원하지 않으니까, 차라리 죽이러 와달라고 악을 질렀다. 목에서 피맛이 났다. 잠깐이라도 좋아. 죽기 직전에 잠깐, 눈이라도 마주쳐준다면, 그냥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죽여달라고 애원하면서도 자살을 꿈꾸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다. 사실 죽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사람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좋은 거야. 이까짓 목숨 따위는 선뜻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이름 모를 당신이 보고 싶다.
아무도 오지 않는 걸 보면 정말로 혼자인가 봐.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잔뜩 긁힌 성대가 쇳소리를 냈다. 한참이나 발작에 가깝게 버둥거린 사지에 힘이 쭉 빠지고, 감정을 밑바닥까지 소모한 머리는 탈진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지랄을 한 거지. 겨우 이러려고, 이렇게 비참해지고 싶어서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나….
메가폰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러 갔다. 안개 낀 듯 흐릿한 의식 속에서 조회대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밟혔다. 버릇인 혼잣말이 입 밖으로 새어갔다.
“바람 타고, 파도 타고, XX남자중학교 가을 운동회…….”
운동회.
아주 오래전에 아픈 목덜미가 욱신거리니 저도 모르게 손으로 감쌌다. 통증이라니, 이렇게나 오랜만에 느끼면 반가울 법도 한데 두렵기만 했다. 싫다. 이제껏 아주 많은 이빨 자국을 새로 만들었지만, 자신이 인간성을 뺏긴다면 범인은 그놈일 것 같았다. 공포가 혈관을 장악했다. 아냐. 아냐, 흥분하지 마. 그러지 마. 잠복기였으면? 이렇게 피가 빨리 돌았다가, 순식간에 머리가 돌아버리면?
“아니야. 아냐, 아니야……. 싫어……”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입술이 바쁘게 움직이며 거친 숨에 중얼거림을 섞었다. 사람 목소리를 들은 좀비들이 운동장 근처를 기웃거렸다. 방황하는 시선이 사물의 동세 유무만을 구별했다. 움직이는 것과 멈춰있는 것이 구분된다. 사람 모양은 움직이고, 풍경은 멈춰있다. 나무가, 조회대의 기둥이, 건물 창문이, 운동장 모래가, 골대가, 남자애가, 태극기가.
어라. 그건 펄럭이는데. 근데 방금 뭐라고?
“……아, 안녕하세요.”
거의 반사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시체라기엔 운동장 바닥에 앉아있는 꼴이 퍽 멀쩡하다. 시체가 저렇게 힘 있게 상체를 세우고 있을 수 있나. 사람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희망적인 견해로, 좀비가 아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려움은 온데간데없고 환희가 온몸을 채웠다. 탈진한 다리가 힘있게 지면을 박차고 달렸다. 살결을 스쳐 지나가는 공기가 시원하고 매끄럽다. 목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오늘 뱉은 목소리 중에 가장 단단한 음성이었다.
“저기요!”
기웃거리던 놈들이 사람 목소리를 확실하게 식별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의재는 그것들보다 빠르게 뛰었다. 일렁이던 시야가 선명해진다. 교복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남자애가 운동장 바닥에 주저앉아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쁜 숨 사이에 섞여나가는 웃음이 천진하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푸르게 웃었다.
“야!”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웠다. 그제야 창백한 낯빛이 눈에 들어온다. 차가운 체온과 반쯤 벌린 입술, 초점을 잃은 눈, 거멓게 죽어버린 오른쪽 눈동자.
세상이 나를 존나, 진짜 존나 억지로 까는 듯한 날이 있다. 이제 다들 알겠지만, 사정이 이렇게나 기구하다.
“너 교복 윗도리는 어디 버려두고 왔어. 지갑도 없고.”
명찰이나 학생증이 있으면 이름을 알 수 있을 텐데, 반응도 없으니 사정 봐줄 것 없이 온몸을 다 더듬거려 뒤졌지만 진짜 옷가지에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요즘 중학교도 휴대폰 걷나? 있어도 전원을 못 켜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겠지만.
“뭐라고 부르지. 야……, 는 좀 정 없다. 그치.”
“…….”
“이름이 뭐야. 응?”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한가. 말하는 좀비라니, 계절이 3바퀴를 도는 내내 한 번도 못 봤다. 날짜 감각은 옛날에 죽 쒔어도 날 더워지고 눈 내리는 건 알았다. 물론 제 앞에 앉은 게 사람 아닌 줄도 공연히 알았다. 단 냄새가 하나도 안 났으니까.
무슨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끌고 왔는지 모르겠다. 등 뒤에서 괴성과 함께 무른 사지를 질질 끌며 달려오는 좀비들, 제 앞에 맥없이 주저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 그 둘의 괴리가 너무나도 컸다. 저것들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는데도 애를 둘러업고 달렸다. 좀비 아포칼립스 생존기를 3년씩이나 찍고 앉았으면 없던 파쿠르 실력도 생기는 것이다. 중간부터는 역시 좀 벅차서, 결국 소매를 걷긴 했지만.
그냥 힘이 없는 건가. 왜? 너무 굶어서? 좀비도 아사를 하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럼 저 밖에 멀쩡히 돌아다니는 놈들은 얼마나 포식을 했을까, 하는 생각까지 미치고 그만두었다. 역겨운 생각이었다. 진짜 못 움직이는 건지, 안 움직이는 건지 간단하게 시험할 수 있었다.
소매를 걷자 손목까지 빼곡하게 자리한 흉터 위로, 그새 연분홍빛으로 아문 칼집이 보였다. 의재는 딱 한 마디 옆에 새로 그었다. 자해하는 취미는 없지만 해야 한다면 되도록 쓸모 있게 하고 싶었다. 이빨 모양 흉터보다는 칼로 낸 흉터가 그나마 보기 좋지 않나? 이미 있는 흉터를 지울 수는 없으니, 새것으로 덮을 수밖에.
한 손으로 양 뺨을 눌러 쥐고, 팔을 들이밀었다. 내내 넋이 나가 있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퍽,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손이 가슴팍을 힘없이 쳤다.
“…….”
잡았던 얼굴을 놓고, 차의재는 슬그머니 소매를 내렸다. 마주 앉아 방금 저를 친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남우진에게서 주워들은 적이 있다. 혈색이 죽긴 했지만, 돌아다니는 좀비들이 시체는 아니라고. 따지자면 휴면에 가깝다고 하던가. 뇌와 장기가 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하고, 온몸의 근육이 아주 기초적인 근육의 반사작용으로만 움직이는 상태. 따라서 그는 소생을 꿈꿨다. 시체면 모를까, 죽지만 않았다면 살릴 수 있단 것이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좀비의 몸이 썩어가는 것은, 회복 능력을 상실한 인체에 생긴 상처가 소독이나 봉합 따위의 관리를 받지 못한 결과라고 하던가.
“멍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창백한 손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한참을 살폈다. 다행히 실핏줄 하나 터지지 않았는지 색이 변한 구석은 없었다. 상한 곳은 최초 발견한 오른쪽 눈이 전부였다. 물린 자국은 없었다. 상처로 감염되어서 변하는 속도가 느린 건가? 그럼, 아직 변하는 중인 걸까?
차의재는 서원병원에서 보았던 격리자들을 떠올렸다. 서원병원에는 그런 사람이 아주 많이 왔다가, 시체로 나갔다. 이불을 싸매고 온종일 울던 사람, 당장 뭐라도 해보라며 가운 멱살을 쥐던 사람, 흐릿한 이성의 끝자락을 쥐고 애원하던 사람. 제발, 제발, 잠깐만요, 조금만 더요, 하는 뭉개진 발음.
반쯤 강을 건넌 그는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다. 혼자 남겨두지 말라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 혼자 남는 게 더 두려워 가지 말라고 빌었다. 그 느낌을 너무도 잘 아는 차의재는 도저히 그를 떠날 수가 없어서, 그가 온전히 이성을 잃을 때까지 곁을 지켜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팔을 부러트릴 듯 움켜쥐고, 잔뜩 새고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가지 말라는 말만 연신 반복했다. 그가 한마디 뱉을 때마다 문장이 괴성에 가까워졌다. 숨 조절이 안 되는 듯 꺽꺽거리면서도 미친 듯 중얼거린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걸까? 다 문드러진 문장을 뱉는 뺨과 한계를 넘은 팔이 파르르 떨린다. 그것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냥,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에 했던 행동을 어설프게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의재는 타액 끓는 소리가 뒤섞인 괴성을 가지 말라는 애원으로 들었다.
내가 이렇게 흉하게 변할 때,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을까? 방금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무례한 생각인 줄 알고도 그런 우울을 떨칠 수 없었다.
차의재는 소년을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종일 업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일으켜 세워놓고 걸음마부터 시켰다. 양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니, 무너진 무게중심을 따라 주춤주춤 발을 디뎠다. 느리긴 해도, 발바닥으로 땅을 딛고 걸었다. 소년이 걷는 속도에 맞추려니 좀비들을 따돌리며 다닐 수가 없어서, 차의재는 다시 소매를 걷었다. 서울을 떠난 이후 성하게 유지하던 팔이 도로 캔버스가 될 처지였으나 유감은 없었다.
맞잡은 손이 차갑다. 운동화 밑창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뒤따랐다. 그어어, 끅, 하고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다른 시체들과 달리 그 애는 조용했다. 손을 잡고 끌고 있는데도, 종종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 게 맞는지 걱정될 정도였다. 슬쩍 뒤를 돌아보면 흐리멍덩한 눈 하나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통수 뚫리겠다.”
사실, 그 애의 초점은 차의재의 뒤통수를 훌쩍 넘은 공기 중 어딘가에 맞춰져 있었는데, 의재는 그것을 바라본다고 표현했다. 직선으로 흐느적 뻗어나가는 시선을 피해 몸을 물리면 고개가 따라왔다. 이것만큼은 그의 행복회로에 기반한 것이 아닌 객관적 사실이었다. 나머지 모든 것과는 다르게.
차의재는 자주 그 애에게 말을 걸었다.
“너 이 근처 살았을 거 아냐. 사실 네가 나보다 길 더 잘 아는 거 아냐? 시내가 어느 쪽이야?”
“내 옷 맞으려나……. 너 왜 이렇게 말랐어. 진짜 애 같다. 말문 트이면 형이라 불러라?”
“야, 캠핑장에 빔 프로젝터 있더라, 써보고 싶은데, 발전기 무거워서…. 아예 그쪽으로 살림 옮길까? 인적 드물고 좋을 것 같은데.”
“눈은 어쩌다가 다쳤어. 아프게 생겼네……. 그래도 안 아프지?”
그 애는, 아주 조용했다. 차의재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시체를 앞에 앉혀두고 자꾸만 말을 걸었다. 시선도 못 맞추는 것을 사람처럼 대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그런 자각은 애써 죽였다. 얼굴을 맞대고, 말을 걸고, 같이 걷고, 함께 잠들었다. 어쨌든 그 애는 의재를 비난하지 않는다. 말없이 차의재를 떠나지도 않았다. 사실, 소년은 손을 잡고 끌어당기지 않는 이상 걷질 않았지만, 어쨌든.
목욕 후에는 차가운 몸에 한동안 온기가 돌았다. 차의재는 따뜻한 몸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제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이제는 기억도 흐릿한 과거부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암울한 순간까지, 몇 번이나 털어놓았다. 지금껏 만난 사람들에게는 한 번도 하지 못한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너무도 하고 싶었던 말들이다. 제 인생을 남기고 싶지 않은 인간이 세상에 어딨겠는가.
제 목덜미에 기댄 머리통을 가만가만 쓰다듬고 있으면, 맨살에 닿는 작고 가는 숨이 정말 사람 같았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현실이 급작스레 그를 치고 올 때가 있었으나, 견디고 나면 다시 온화한 시간이었다.
기껏해야 눈 깜빡거리는 게 전부인 아이인데, 그게 뭐라고. 잠들기 전 소년의 눈을 소독해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머리를 쓰다듬는 시간이 너무도 소중해서, 이런 날이 평생 이어지기를 바랐다.
“아, 내일 붕대 가지러 가야겠다.”
의재는 캠핑장 관리사무실로 이주한 후로 생필품을 가지러 잠깐 나갈 때는 소년을 두고 다녔다. 한참 내버려 둬도 얌전히 기다려주니까. 긴 길을 같이 걸었다간 느린 걸음에 속이 터져서 못 참고 업어줄 게 뻔하다. 캠핑장 바로 옆이 산책로인데, 위험하게 도시에 데리고 갈 필요가 있나. 소년은 저만치 떨어져서 봐도 좀비였다. 그날, 왜 사람으로 착각했을까 싶을 정도로. 기실 정신이 나가 있었던 탓에 흔들리는 나무 그늘도 사람 그림자로 착각하던 때였다.
“같이 갈래?”
귀갓길에 그은 팔에 채 굳지 않은 말랑한 피딱지가 앉아있다. 이렇게 깊게 그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통각을 상실하니 대강 그었다간 한 마디도 더 깊게 칼날이 머리를 처박곤 한다. 이러다가 날 끝에 뼈가 걸리는 느낌이 들면 그건 좀 무서울 것 같아서 의재는 의식적으로 몸을 소중히 했다. 금방 나을 상처에 붕대를 감는 것은 은폐의 목적도 있다만 그쪽이 좀 더 컸다.
손가락 수준으로 가늘어진 붕대를 팔에 둘둘 감으며 물었다. 대답이 안 돌아올 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늘 그랬으니까. 여기서 기다릴 거지? 하고 덧붙이려던 참이었다.
“—.”
밖에 뭐 기어 다니나? 그러니까, 벌레나 날짐승 말고, 좀비가.
그건 분명 인간의 성대가 내는 소리였다. 유아의 울음소리도 아니고, 사람의 언어도 아니고, 이지를 상실한 인간의 성대가 아무렇게나 자아내는 울음소리. 물론 차의재는 바로 앞에서 들렸단 걸 알고 있다. 귀가 있으니까 모를 수가 있나. 아는데, 알고 있는데.
의재는 관리사무실을 나가 캠핑장을 한 바퀴 돌았다. 뻔하지. 사람도 좀비도 없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캠핑장은 생필품 구하기 최악이니 사람이 없고, 사람이 없으니 좀비도 없다. 차의재와 소년뿐이었다.
길게 숨을 들이마신다. 차가운 밤공기가 기도를 시리게 저미고, 폐가 버거울 정도로 팽창한다.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몇 번이나 허공에 대고 애원하던 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였다. 기워 맞춘 삶이지만 분명 전보다는 온건한 상태였다. 어두컴컴한 밖에 쪼그리고 앉아 몇 번이나 심호흡하다가 실내로 돌아갔다. 도망치기만 할 줄 알던 과거보다는 명백히 더 나은 대처였다. 이건 역시 네가 만들어준 변화겠지.
그 애는, 문을 열고 들어온 차의재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소년의 입은 얕게 벌린 채 미동도 없다. 언제 좀비처럼 울음소리를 내었냐는 듯, 조용하다.
“너 곧 말도 하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장난스레 물었다. 바깥에서 추위에 언 손을 검고 부드러운 머리칼에 묻으니, 내내 집 안에 있었던 소년의 머리통이 언뜻 따뜻하게 느껴져 마음이 울렁였다. 집에서 혼자 어지간히 심심했었나 보지. 오죽하면 말 한마디 없던 애가 말문이 트이겠냐…….
“약국, 같이 가고 싶은 거 맞지?”
왜 또 대답이 없어. 차의재는 미지근한 몸을 안고 조용히 고독을 삭였다.
*
움직이는 시체들과 차의재는 서로를 없는 듯 취급했다. 도시는 아주 오래전 그들의 것이 되었으므로, 의재에게는 주인 없는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럴싸한 장래 희망이나 비전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차의재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상대적 지위에 국한되는 이야기였다.
의재는 약국 창고 구석의 책상에 소년을 앉혀두고 상자를 열었다. 하도 많이 와서 어느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 다 알겠다. 솔직히, 이쯤 되면 쇼핑 내지는 구경에 가까운 행위였다.
“소독약 이번엔 투명한 걸로 가져갈까? 설명서 보니까 빨간약이랑 똑같대. 근데 뭔가 빨간약이 나을 것 같지 않냐? 어차피 따끔거려도 모르잖아. ……모르는 거 맞지? 알고 보니까 너, 아픈데 말을 못 해서 참고 있는 거 아니지? 어제는 소리 냈잖아. 아프면 소리라도 질러.”
소년이 그르르, 하고 울면 어떨까? 오면서 몇 번이나 마주친 그것들처럼 울고, 발을 끌고, 고개를 흔들고, 턱을 떤다면? 사실 아주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역하다. 그래도, 아픈데 티도 안 내고 참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다.
나는 이 애를 왜 이렇게까지 아끼지. 사람도, 좀비도 아닌 게 같은 처지처럼 느껴져서? 그럼 이 애가 완전히 좀비가 되어 버리면, 그때는 이 정이 다 식을까?
약국의 카운터와 창고 사이를 분리하는 벽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코팅된 종이가 서로를 스치고, 빈 갑이 바닥을 구른다. 잠깐 굳어있던 머리가, 막 전원을 켠 LP 플레이어처럼 천천히 가속한다. 잠깐, 얘 정도면 사람처럼 보이지 않나? 취소. 콩깍지 끼고 봐도 좀비다. 이러는 와중에도 명백한 사람의 소리는 창고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사람이었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소원하던 존재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기뻐서 달려가지는 못할망정 이렇듯 낭패에 잠기게 되는 이유가……
그 이유가, 차의재의 고독을 위로한 존재가, 바로 옆에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무력하고 얌전히 그가 앉혀준 자세 그대로 책상에 걸터앉아있다. 그가 없으면 숨 쉬는 시체에 불과한 그의 소년이 거기 있었다.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의재는 잠바 지퍼를 목 끝까지 잠가 올리고 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점점 벌어지는 문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살아있는 사람 특유의- 차의재만이 느끼는, 달큰한 냄새가 났다.
“-어머, 깜짝이야…….”
상대는 혼자다.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도, 아니, 그런 상황은 없다. 그런 상황은 만들지 않을 거다. 그렇지만, 어떻게? 무릎이라도 꿇고 빌면 지나쳐줄까? 물리적으로 부패하는 세상에 인류애는 살아있는가? 세상이 인간을 기만하고 죽은 이를 모독하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여유가 남아있을까?
인류애가 살아있다 한들, 그것이 차의재에게도 해당하나? 그의 소년에게도?
“뭐…… 찾으러 오셨어요?”
“아. 혹시 여기 사시는 분이세요? 죄송해요~. 주인 있는 곳인 줄 모르고, 그만. 별거 안 챙겼어요. 도로 가져다 놓을게요.”
“아, 아니요. 가져가셔도 돼요.”
“정말요? 다행이다. 필요했거든요. 혹시 괜찮으시면 안에 잠깐 들어가 봐도 될까요? 못 찾은 게 많아서요. 아, 저, 자랑하는 건 아닌데~ 이쪽에서 일했어요.”
“네, 네.”
“네에. 혹시 여기서 잘 모르는 거 있으시면 제가 알려드릴 수 있어요. 음~. 여기 사시는 분 아닌 것 같은데? 맞죠. 약 구하러 오신 거예요? 안색이 안 좋으시다.”
“아니, 그, 괜찮아요. 근데 안에 애가 있어서요. 여기서 기다려주실래요? 이름 불러주시면 제가 가져올게요.”
“이름 불러드려도 못 찾으실 텐데. 이름들이 좀 어려워서. 그나저나, 애요?”
기웃, 고개를 들이밀려는 것을 간신히 막아섰다. 여자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밝게 웃었다.
“아, 죄송해요. 애 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그만.”
뒷짐을 지고 물러서자, 잘그락, 하는 소리가 들린다. 기실 그뿐만 아니다. 어쩐지 고요한 바깥, 산전수전 다 겪은 생존자라기에는 지나치게 단출한 짐과 발랄한 말투.
눈, 금이 간 안경알 너머로, 가늘게 실핏줄이 올라온 흰 자 한가운데서 번뜩이는 갈색 눈동자.
피 냄새가 난다. 차의재는 언제나 제 피 냄새를 맡고 살아서 몰랐다. 지나친 긴장으로 머리가 멀어버려서 제 언행이 수상쩍게 비치는 줄도, 눈앞의 여자가 소름 끼친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요, 그럼. 불러드릴 테니까 찾아와주세요,”
“네. 박스 안에 담겨있는 거예요?”
“아마도요~. 좀 깊숙이 있을 거예요. 잘 안 쓰는 약이어서.”
창고 안으로 돌아서며 의재는 문득 제 손을 확인했다. 달달 떨리는 손의 헐렁한 소매 아래로 무수한 칼자국들이 빼꼼 끝단을 비추고 있다. 봤을까. 아니, 이건 보여도 괜찮다. 어쨌든 물린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도. 안도의 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씨발, 존나 무서웠네. 가시면 애 업고 바로 집 가야지. 하필이면 오늘 만나냐…….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보다 좋게 끝난 것 같아서,
탁. 무언가 가로막힌 듯한 타격음이 들린다. 의재가 과거에 자주 들었던 소리다. 이상하다, 보통은 좀 더 잦게 반복해서 들렸는데. 좀비란 것들은 떼로 몰려다니기 때문에 한 발로는 어림도 없다. 아무리 괜찮은 소음기를 써도 총격이 그렇게 연이어 반복되면 결국 근방의 놈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와서, 의재는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총을 쏘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니면, 쏘는 사람이 겁을 상실한 미친놈이거나.
복부에서 희미한 통증이 느껴진다. 통증이라니. 앞으로 내디딘 다리가 꺾이고 몸의 중심이 무너졌다.
“조용해서 좋네요. 아, 기절했나?”
기절한 설정 좋네. 사람이 총 맞으면 기절하지, 아무래도. 근데 그럼 그 애는 누가 변호하지.
“저, 컥, 흐……”
목구멍을 턱 가로막은 핏덩이 덕에 명연기가 따로 없었다. 아픈 사람은 어떤 목소리를 내더라. 복부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감각을 좇아 집중하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애가, 선생님. 애는,”
“반응이 느리구나~. 응, 애는?”
“착… 해요. 얌전하고. 정말이에요.”
“어머, 정말? 저거?”
굽 낮은 단화가 시멘트 바닥을 두드렸다. 왜 못 알아봤지, 딱 봐도 제정신 아닌 여자를.
그야, 너무 오래 홀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차의재는 17살 이후로 이렇다 할 관계를 쌓아본 적이 없다. 멀쩡한 집이 폭격을 맞고 무너진 꼴이었다. 잔해를 주워 손으로 쌓아본들, 바람 불면 쓰러질 돌탑이었다. 폭풍 아니면 돌풍이 몰아치는 곳에서 주저앉아 탑을 쌓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걸 알면서도 쌓는 행위에 의미를 두었다. 이렇게라도 살아야겠으니까.
“음, 평범한데.”
폐허 위의 폐허, 시체 위의 시체, 죽음 위의 죽음. 차의재의 인생은 그랬다. 어쩌면 좀비란 말이 딱 어울릴지도 모른다. 도무지 한계 없이 추락하는 삶이었다.
“너 정신 제대로 나갔구나? 이걸 키우겠다고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아니에요.”
“아니긴. 봐. 아, 곧 죽을 사람한테 너무한가? 말로 설명해줄까? 당장이라도 나 물 것 같아, 얘.”
“아니라니까.”
“웃긴다. 친형제도 아닌 것 같은데. 하하, 진짜 동생은? 죽었어?”
여자는 잔뜩 신난 목소리로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끊김이 전혀 없는 게,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광인의 혼잣말에 가깝다. 불규칙적으로 이빨이 딱, 딱 거리는 소리가 문장에 겹쳐 들린다. 그럴 리 없는데.
“상태 너무 좋다. 관리 잘해주면 이 정도까지 유지가 되는구나~. 백신 같은 거 왜 개발했나 몰라. 너도 얘 데리고 서원에 안 간 거 보면…… 아, 혹시 연고도 없는 애 납치한 건가? 치료해주면 떠날까 봐 이렇게 개처럼 끌고 다니는 거야? 멋있네. 맞아, 다들 너무 힘든 시기잖아. 먹고 살기도 힘든데 이런 것까지 뺏기면, 미쳐버리지…….”
그야 그 애는 말을 못 하잖아. 아무것도 못 하니까, 그러니 의재는 소년의 동의를 구한 적이 없다. 잡아당기지 않으면 걷지도 않는 애를 그의 모교로부터 여기까지 데려온 건 오로지 차의재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불가항력의 일이노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내가 그랬나? 내가 널 납치해서, 개처럼 끌고 다녔던가? 가족이라고 허울 좋게 포장해놓고, 가축 기르듯 대했던가?
“음~. 그냥 갈게. 형제가 나란히 감염되면 보기 좋잖아. 죽기 전에 동생한테 밥도 챙겨주고, 같이 불사의 삶도 살고……. 영원히, 같이.”
어쩌면 다 내 착각이었나? 내가 정말 미쳐버려서 네가 울어도 모르고, 네가 도망치면 잡아 오고, 그래놓고 다 잊어버린 거라면?
사실 넌 나랑 살기 싫었다면?
너도 나랑 사는 걸 끔찍하게 여겼다면?
굽 소리가 자취를 감춘 후, 도로변에서부터 몇 번이나 총격이 들려왔다. 저 여자 가진 게 탄창밖에 없었나, 싶을 정도로 질리도록 길고 잦은 총격이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차의재는 거기서 안도했다. 시체에 총질하길 진심으로 즐기는 저 미친년의 총구가 제 소년에게는 향하지 않았다.
백신이 있든, 없든, 다시는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할 시체들이 거리에 쌓여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차의재는 저 재앙이 한시라도 빨리 영영 떠나줬으면 싶어 한마디 만류도 못 하고 죽은 듯 약국 창고에 늘어져 있었다. 망가졌다. 다른 말로는 상실했다. 차의재가 한때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그를 떠나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사람을 돕고 살아야 한다고 믿었는데, 목의 자국도 그렇게 얻은 게 아니었던가. 하지만 차의재는 그날을 원망하고 그놈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일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건 차의재에게 단 하나 남은 인간성이었다. 차의재는 별 소용이 없는 줄로 알면서도 소년의 상처를 돌보고 싶었으며, 자신이 느끼는 동질감이 갈기갈기 찢겨도 좋으니 자신이 그를 아프게 하면 알려주길 바랐다.
나는, 우리가 가족이 아니게 되더라도 네게 ‘삶‘을 돌려주고 싶다.
저가 보는 세상이 아무리 어긋나고 왜곡됐을지언정 이 작게 닳은 마음만큼은 분명 사실이었다.
“근래에는 보건소에서 감염 사례가 자주 발생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아, 네. 맞습니다. 많은 보호자 분들께서 가족, 혹은 지인이 감염된 직후에 병원이나 보건소를 찾으시는데요. 우리가 흔히 백신이라고 부르는 이 약품은 사실 항생제에 가깝습니다. 백신은 인체의 면역체제에 적절한 값을 입력하여, 특정 병원균에 대한 저항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는 반면, 항생제는 병원균 혹은 바이러스를 직접적으로 죽이는 역할을 해요. 문제는, 서원병원에서 개발된 이 항생제는 활동하는 인간의 세포와 좀비 바이러스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백신 투여는 좀비화가 완전히 진행된 것을 확인하고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한 격리기간이 최소 3일에서 최대 한 달 정도 소요됩니다.
하루빨리 백신을 맞기 위해 찾아왔다가, 격리소로 뒤늦게 이송되며 이송 도중에 증세가 심해지는 경우가 정말 잦은데요. 이로 인한 감염 사례의 주 피해자는 공무원이나 병원 관계자분들이고요.”
“아하. 그럼 감염 직후에는 병원이나 보건소로 가면 안 되겠네요.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요?”
“가까운 경찰소나, 임시 격리소로 가시는 걸 권장하고 있습니다. 전화선이 있으신 경우 112로 전화 주시면 저희, 경찰이 금방 방문하니까요. 부디 시민 여러분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이번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피해를 최소화, 그거, 참 듣기 좋은 소리네.
상공 1m에서 자유낙하 한 라디오가 바닥과 충돌했다. 모서리가 좀 우그러진 게 전부고 산산조각나지는 않는다. 생각보다 튼튼했다. 마음처럼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서울 존나 멀어.”
3년 동안 도망친 결과였다. 빈집에서 며칠, 혹은 몇 주씩 지내고 살림을 옮기길 반복하며 방랑벽 있는 사람처럼 굴면서도, 차의재는 발을 떼기 전 꼭 지도를 펼쳤다. 어쨌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곳의 과거가 정말 곱고 사랑스럽단 걸 떠올리기 싫다. 현재가 너무 비참해서 덧대어보고 싶지 않다.
아니, 다 거짓말이다. 차의재는 그냥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삶에 쫓겨 도망다닌 나머지 부모 얼굴마저 잊어버렸단 것을, 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아끼고 아끼다가 그만 망각의 협곡에 일부 떨어트리고 말았단 것을 도무지 인정하기 싫었다.
그에게는 전부 삼키기 버거울 정도로 많은 불행이 주어졌으므로, 차의재는 그렇게 여러 번 도망쳐왔다. 그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가긴 가야 하잖아. 너 치료하는 김에 나도 되는지 한 번 보고, 안 되면 말고.”
그야 물론 안 되겠지. 차의재도 알고 있었다.
그토록 자주 무너지면 걷는 법을 까먹게 된다. 일어서고 무너지는 것만 반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실상 희망이란 신기루 같은 것, 단순히 그가 당장 무너지지 않게끔 잡아놓는 얇고 나약한 지지대에 불과했다.
국도에는 아무도 없다. 그와 소년의 넓고 고요한 집처럼, 사람도 좀비도 없었다. 국도는 생존하기에 최악의 조건이었다. 지붕 없지, 벽 없지, 먹을 거 없지. 괜히 이쪽으로 왔나.
“잠깐만 여기 있어.”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잦아서, 의재는 이따금 자리를 비웠다. 떠나기 전에 홧김에 챙긴 담배 두 갑이 내용물을 잃어갔다. 담배는 그냥 핑계에 불과해서, 괜히 입에 물고 연기를 마시기보다는 불붙여 놓고 손에 든 채 멍 때리는 시간이 더 길었다. 차의재는 실처럼 얇게 피어오르는 흰 연기를 보며 분노인지 설움인지 모를 감정을 견뎠다.
시련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닥친다면,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니체 승. 역시 신은 죽었다. 차의재는 담배 두 개비가 다 타서 사라진 후에야 소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잠깐 숨 돌리는 것도 한계가 있지, 한평생 도망쳐서 버텨온 삶이었는데 이제 와 직면하려니 지나치게 힘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직면하냐면, 사실 그것조차 직면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지껄여보자면,
차의재는 그리운 집이 무섭고 서원병원이 먹먹했고 서울이, 서울에서 도망친 자신의 역사가, 실패와 좌절과 회피의 연속인 제 삶이 싫었으며 자신의 학창 시절이 쓰라렸다. 고등학교를 기껏해야 몇 달 채 안 다닌 차의재는 아무래도 학창 시절, 하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기대와 걱정에 잠 못 이루던 중학생을 떠올리지, 고등학생인 자신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렇게 흠 없는 추억을 꺼내면 그 뒤에 마련된 불행이 한층 더 무거워져 아팠다.
또한 의재는 저가 서울에서부터 내려올 때 걸었던 편한 길을 놔두고 국도를 선택한 자신이 싫었다. 이 역시 비겁하고 치졸한 도망자의 선택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국 좋지 못했던 당신들과의 이별을 피해 또 한 번 한 발짝 빗겨 걷고 있다.
그리고 차의재는 그 애가 밉다.
아니야. 싫을 리가. 허나 그럼 좋아하냐고, 그것도 선뜻 긍정할 수가 없다. 종종 사람의 마음이란 좋고 싫음으로 분명히 갈리지 않기 마련이라 의재는, 그 애 곁에 있을 때 느끼는 비참함과 질투를 막을 길이 없어 담배를 태우곤 했다.
확실한 건 차의재에게 소년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참을 수 없이 미워하면서도 한평생 외면한 공포를 이겨내고 어떻게든 과거로 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으니, 그 모든 건 오로지 그 애를 위해서라고, 정말 이것만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 차의재는 소년을 사랑했다.
“형 왔어.”
갓길에 주차되어 있던 차의 보조석에 앉혀두고 나갔었다. 근데 왜 없지. 이 차가 아닌가? 그럴 리 없는데. 사람 없는 국도에 차가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차를 헷갈리겠는가. 타이어 터진 회색 쿠퍼. 분명하다. 못생겨서 두고 간 거 아니냐면서 웃기까지 했는데.
문을 닫지 않았다. 차가 너무 좁아서, 닫으면 답답하니까, 아니, 그런 핑계가 아니라, 그냥 버릇이었다. 어차피 너는 내가 일으켜 세워 잡아당기지 않으면 걷지 않잖아. 어디 가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지. 네가 날 기다려주는 것을 한 번 의심해본 적 없다.
기다려주었다? 어떻게 그걸 그렇게 확신하지. 어쩌면 너는 그냥 기회를 잡은 건지도 모른다. 너는 생각이 좀 느리고 둔하니까, 내가 이렇게 주기적으로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면 기회라고 인식할 수 없었다던가. 집처럼 사방이 막힌 곳에서는 도망갈 엄두를 못 내다가, 다리 한쪽만 내밀면 바깥인 이 보조석에서야 탈출할 가능성을 보았다던가.
도망갔다. 탈출했다. 그러한 문장에는 주어가 필요하다.
……주어가, 있었을까?
서울이고 나발이고 다 내팽개치고 싶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내게서 떠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건지. 어쩌면 내가 너무 외로워서 상상친구라도 만든 걸 수도 있잖아. 만약 그렇다면 제 인생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일까? 인간이 맞긴 한가? 사실 목이 물린 그날 너머의 모든 일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나를 비롯한 모든 감염자가, 모든 좀비가 이런 환상을 보며 살아가는 거라면?
여기선 죽어도 봐줄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죽고 싶었다. 무겁게 짊어진 삶을 1초라도 더 견디고 싶지 않다. 차라리 깔려 죽어도 좋으니.
이게 진짜 밑바닥이구나.
차게 식은 아스팔트에 몸을 늘어트렸다.
세상이 뿌옇게 희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창백한 새벽 햇살이 안구 위를 거닐고 있다. 이럴 때 차의재는 정신이 명료해진 것을 확신할 때까지 눈을 뜨지 않는다. 세상을 다시 마주할 때 인간이길 바랐다.
정신이 명료한가를 시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제 뭘 했는지를 되돌아보면 된다. 일기를 쓰듯이 어제 하루를 회상하고 평가하며, 그것이 이성적으로 이루어지는지 검토한다.
매일 해온 일이었는데, 오늘은 안 된다. 차의재는 그냥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고, 차게 굳은 온몸이 삐걱거렸다. 만약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아파서 앓는 소리라도 냈을 텐데, 차의재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불길한 소리를 내는 관절들을 무시하고 몸을 비틀었다. 햇빛이 싫어서 돌아누울 요량이었다.
자세를 고치며 뻗은 손이 무언가에 닿아서, 소스라치게 놀라 잠도 우울도 날아간 채 몸을 뒤로 물리며 눈을 떴다. 품이 넉넉한 검은색 후드티. 차의재가 언젠가 소년에게 입혀주었던, 그 옷이 맞다. 헐렁한 슬랙스에 후드티를 입은 소년이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야.”
그 애는 조용하다.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 차라리 좀비처럼 울음소리를 내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이제 소년은 동질감이니 뭐니를 떠나서, 차의재의 인생을 알고, 고독을 함께한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년이 좀비든 사람이든 그 중간의 무언가이든 상관없다. 이제 더는 상관없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으로는 부족한데, 그 애는 조용하고, 얌전하고, 저처럼 살갗이 서늘했다. 사람이 아니니 달콤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 다만, 차의재가 직접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준 오른쪽 눈가에서만 아주 옅은 소독약 냄새가 난다.
사실 그걸로도 부족했다. 정말 여전히 부족하다.
“형이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래도 차의재는, 저와 똑같이 차게 식은 손을 붙잡고 울었다.
어디 가지 마. 형 잠깐 숨만 돌리고 온 거야. 너 버린 적 없어. 형이 미안해. 나 찾아다녔어? 그런 거지? 진짜 미안. 앞으로는 그냥 그 자리에 있어. 기다리고 있으면 형 금방 와. 진짜야. 나 무조건 너 서울까지 데려다줄 거야.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형 안 보이면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서 기다려야 해. 알았지? 어디 가면 안 돼. 제발……
숫제 애원에 가까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가지 말라고, 기다려달라고, 미안하다고. 하나뿐인 눈으로 멀뚱멀뚱 저를 바라보는 무표정한 얼굴에 대고 몇 번이나.
사실 나는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겠다. 네가 정말 거기 있었을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억의 신빙성은 떨어질 뿐이니, 당장 눈앞에 있어도 믿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영영 믿지 못할성싶다.
하지만 네가 거기 없었더라도, 네가 내 환상에 불과했더라도, 차의재는 결코 서울로 향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저를 위한 낙원이 거기 없는 줄은 뻔히 안다. 저만 없는 낙원이 거기 있단 걸 안다. 그래도 차의재는 국도를 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이 왜 착하게 살아야 하냐니, 착하다는 게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할 것이다. 소년은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고, 그에게 서원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한 적도 없다. 남의 인생이 걸린 중대한 안건을 본인의 인생관에 한 번 묻지도 않고 결정하는 것이 옳은가?
그러니 모든 건 차의재가 소년을 사랑해서 저지른 독단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네가 인간으로서 사회에 돌아가길 바랐다. 바람의 주체가 차의재, 그였다. 죽은 신을 탓하기에는, 이런 행위에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나. 그에 반면 걷지도 보지도 못하는 네가 내게 돌아와 준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니체도 죽었지. 그러나 그와 소년은 아니다. 삶과 죽음, 그 경계선에 걸쳐있을지언정 어느 한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길고 가는 선은 까마득하게 뻗어있고, 이 기약 없는 여정은 한 발짝 내딛는 것이 고역일 정도로 버겁다.
차의재는 사랑하는 이를 밀었다.
서울은 달다. 추상적 의미에서든, 물리적 의미에서든 그렇다. 그것이 품은 기억이 달고 사람 냄새가 달았다.
변명하자면, 차의재는 국도를 건너는 동안 꽤 극심한 식량 부족을 경험했다. 자원의 부족으로 허덕여본 경험이 적어 가난을 예상하지 못했고 아끼는 법을 몰랐다. 좀비 세상에서 먹이 사슬을 벗어나는 규격 외 존재로서 살아온 그에게 궁상이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차의재는 극심히 허기졌다. 이성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이성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허기졌다. 그는 진지하게 국도 한복판에서 고라니라도 잡아먹을까 고민했으나 그럴 재주가 없어 포기했다. 육체적 곤란 때문에 우울한 생각이 덜 드니 다행이라고 여기기도 잠시, 씨발 이건 좀, 하는 생각이 우위를 차지했다. 무식하게 튼튼한 몸만 믿고 가죽 케이스라도 씹어 먹어봐? 하는 충동도 들었다. 실행에 옮겼는지 안 옮겼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어떻게 서원병원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애는 괜찮나? 나는 미칠 것 같은데. 소년은 어디까지나 느린 걸음으로 묵묵히 차의재를 따라 걸었다. 시야가 흐릿하고 다리가 떨린다. 아주 여러 번 길을 잃었다. 헤매어 도착한 모든 곳이 사무치도록 눈에 익었는데 자꾸만 길을 잘못 들었다. 뺨이 시리고 손발에 감각이 없다. 춥고, 배고프고, 피곤하고, 그리고 아주 많이, 아주 많이 슬펐다.
서원병원은 의재가 떠나기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와 서원병원 사람들 몇 명이 함께 차곡차곡 쌓았던 바리게이트나, 의재가 밤새 밖에서 시끄럽게 망치질하며-오는 좀비들한테 상처 난 팔이나 휘적거려 주며- 철판을 덧대 막은 문 같은 게. 어디 하나 상한 구석 없이 깔끔한 걸 보면 이제껏 잘 생존한 모양이다. 그게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상처란 건 그에 비례하는 기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끝이 좀 상했지만 그래도 차의재는 서원병원을 애정했다.
그리고, 너도.
차의재는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는 길 내내 점점 추워지는 날씨 탓에 한 겹씩 둘러 싸맸더니 끝에 와서는 완전히 중무장한 꼴이 됐다. 죽은 몸이 추위를 타겠느냐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마냥 잘해주고만 싶었다.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려 목깃에 반쯤 가려진 얼굴이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좀비가 꼬이지 않았다. 그래서 의재는 서원병원 앞에 앉아 그 어둑한 밤 동안 소년을 붙들고 이별을 곱씹을 수 있었다. 다시는 쓰다듬을 수 없는 결 좋은 곱슬머리를 쓰다듬어본다던가, 여기저기 흙먼지가 묻은 옷을 털어준다던가. 공연히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속삭인다.
“안 그럴 거 아는데, 알지? 사람 물면 안 돼. 형이랑 다르게 막, 맛있는 냄새 나고 그래도…… 이제 같이 살 식구들이니까, 잘 보여야지.”
주절주절 떠들던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이 자꾸만 입술을 두드렸다. 마지막 얼굴을 우는 얼굴로 하기 싫어서, 차의재는 정말 간신히 버텼다.
너의 새로운 인생에 내가 없다는 거, 그거 정말 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나는 여기를 종점으로 두어야겠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더 나은 미래를 이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탓이다.
당장이라도 저를 물 것 같다던 그 발랄한 조롱이 마음에 걸렸다. 저가 믿는단 이유로 남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재는 고심 끝에 소년의 팔을 묶었다. 등 뒤로 모은 팔을 너무 세지 않게 묶고, 재갈을 물리고 있으려니 학교 근처 숲에서 굴렀던 일이 떠올랐다. 소년은 저보다 나을 것이다. 백신이 투약된 후면 결박을 풀어줄 가족이 있으니까. 그는 머잖아 인간으로서 인간 사회에 녹아들 것이다. 차의재는 함께할 수 없는 곳에.
의재는 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소년을 앉히고, 크게 심호흡했다. 심장이 전례 없이 크고 빠르게 뛰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피곤이나 허기에 의한 게 아니라, 긴장 때문이었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지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소년을 마주보며 아리게 웃었다.
사랑해. 그렇지만
차의재는 철판을 덧댄 문을 거세게 몇 번 내리친 후, 그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손날 부분이 뭉그러진 듯 욱신거렸다.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진짜 부러지기라도 한 모양인데, 그렇지 않고서야 아플 리 없으니.
너무나도 아파서, 정말 많이 울었다. 차디찬 겨울 공기가 허기진 속을 가득 메웠다.
내쉬는 날숨에 김도 끼지 않는 소년이 멀어지는 인영을 눈에 담았다. 망막에 비친 실루엣이 점점 작게 크기를 줄여간다.
아무래도 소년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근래 자주 자리를 비워서, 소년은 이제 기다리는 것에는 퍽 익숙해졌다. 더군다나 얼마 전인지 오래전인지 모를 어느 때에 저를 붙잡고 한참이나- 소년의 망가진 인지 능력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한참이나 저를 붙잡고 눅눅하게 굴어댄 탓에 소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기다려야 한다. 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면 온단다. 기다리라고 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심장이 뛰고 등골이 오싹하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리라니. 기다리면 올까? 어디 가지 말라고 했다. 엉망진창인 머릿속을 뒤져 간신히 찾아낸 기억 속의 그는 자신이 말을 해도 울고 걸어 다녀도 울었다. 얼마나 더 얌전해지면 그가 울지 않을까? 여하튼 슬픈 게 싫다. 소년은 슬픈 게 싫다. 슬픈 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그리 순종적인 편은 아닌지라, 그 뒷모습이 점처럼 작아질 때쯤 끝내 몸을 일으켰다. 지금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그냥 그 자리에 있어. 기다리면 금방 와. 어디 가지 말고.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기. 기다리기.기다려야 해. 어디 가면 안 돼.
제발.
중심이 무너졌다. 부딪힌 바닥이 까끌까끌하고 딱딱하다. 기다리기. 기다리면 와. 형이 일으켜 세워주겠지.
그러나 그를 일으켜 세운 건 방금 막 잠에서 깬 16세 청소년 유채현으로, 이 모든 진실은 바이러스로 인해 저하된 단기기억력에 의해 말소된다.
잔상
어떤 상실을 기점으로, 근 8년간 차의재는 사회성을 기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우선 그는 팔다리와 목에 감았던 붕대를 풀고, 소매와 목이 죄 감춰지는 옷만 입기 시작했다. 턱 바로 아래까지 올라오는 목티를 입고 소매를 최대한 당기면 흉진 부분은 거의 다 가려졌다. 붕대와 달리 보기에도 썩 나쁘지 않았으나, 날이 더워지면 의심을 샀다. 고로 차의재의 새로운 인연들은 가을에 만나, 봄에 헤어졌다.
박하은과 할머니는 여름에 만났다.
주스나 과일즙을 채우고, 막대가 꽂힌 덮개를 씌우도록 만들어진 얼음 틀을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 많은 부모는 그 광고를 보고 탄식했으리라. 끈적끈적해질 주방 상판이며, 그것 설거지는 또 어떻게 한담.
과연, 얼린 오렌지주스는 당연하지만 맛없었다. 혀가 멀쩡했으면 맛있게 먹었으려나. 글쎄,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지도 않고, 사각사각 잘 부스러지는 식감이라 잘못 베어 물면 전체가 무너져 손 위로 쏟아졌다. 녹기는 또 얼마나 빨리 녹는지. 차의재는 마트 구석에서 발견한 아이스크림 틀을 주워온 걸 상당히 후회했다.
“날씨 존나 덥네.”
여름이면 혼잣말이 재발하곤 한다. 아무래도 말을 걸 사람이 없어 그렇다. 정적이 무서워 한 마디 뱉고 나면,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실감하고 싶지 않아 자꾸만 중얼거리게 된다. 다 알지만 고칠 방법이 없어 방치하고 있다.
축축한 반팔 티의 목 부분을 펄럭거리며, 차의재는 앙상해진 연노란색 플라스틱 바를 베란다 난간 너머로 던져버렸다. 다회용인 줄 알지만 두 번 쓸 생각은 없었다. 양치해도 어렴풋이 남는 떫은맛 탓에 매일 같이 혓바닥을 박박 긁어내고 싶은 심정인데, 간식까지 먹을 정신적 여유는 없다.
“쓰레기다.”
그 순간 아래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손이 녹은 오렌지주스로 범벅이 되어도 안 느껴지던 단내가 강하게 풍겼다. 등골이 섬찟했다.
쟤가 말한 쓰레기가 과연 아이스크림 바일까? 무단투기범인 내가 아니라? 어쨌든 차의재는 빌라 베란다에 앉아서 도로변으로 쓰레기를 던진 쓰레기였고, 세상은 사계 가리지 않고 좀비가 우글대는 아포칼립스였으며, 그러므로 도로에 아이가 있을 수는 없다. 내가 또 미쳐서 별의별 환청을 듣나. 이쯤 되면 경이로운 수준의 회피 기제를 향해 손뼉을 쳐주자.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
그렇지만 역시, 차의재는 몇 번을 속아도 한 번 더 속아주고 싶다. 가엾은 이웃의 탈을 쓰고 다가오는 이들에게 몇 번이고 사기당해도, 평생을 같이 있어 줄 것처럼 굴던 이들에게 몇 번이고 배신당해도, 가족처럼 함께했던 이가 나의 망상에 불과하더라도.
차의재는 어디 구석에 처박아놓은 겉옷을 챙길 정신도 없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얇고 촘촘한 베란다 난간의 살 너머로 보았던 얼굴은 어린 여자애였다. 신기루인 걸 왜 걱정해. 사실 없었으면, 내 망상이었으면 차라리 다행이지. 어차피 종일 방에 처박혀 늘어져 있었을 텐데 조깅도 하고 좋네. 차의재는 차라리 그 애가 거기 없길 바랐다. 너무 위험하잖아.
노란색 우비를 뒤집어쓰고 후드 줄을 단단히 여민 아이는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 애는 반팔티 차림의 의재를 보고도, 할머니 다리가 아파서 그런데 병원이란 곳에 데려다줄 수는 없겠느냐, 그렇게 묻기만 했다. 의재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어정쩡하게 팔을 감싸 쥐었다가, 이따위 행위로는 팔을 다 덮은 회색빛 이빨 자국을 가릴 수 없단 걸 깨닫고 손을 내렸다.
아주 나중에서야 의재는 하은이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을렀다.
“아프거나 이빨 자국 있는, 삼촌 같은 사람은 위험하잖아. 알지?”
“응. 눈빛이 이상해질 때 도망가면 돼.”
아무리 그가 생존력 만렙이라 해도, 좀비 세상에서 나고 자란 아이의 스킬을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박하은은 이미 그런 경험을 많이 해봤다. 저 나름의 대처법도 가지고 있고.
아마 그런 대처법을 익혀야 했던 건, 저 같은 사람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 너무 많았던 탓이겠지. 그래서 의재는 그렇게 날이 더운 데도, 저 내킬 때면 언제든지 달아나겠다는 당돌한 아이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근데 하은이랑 할머니는 어디까지나 예외고.
의재는 힐끔 사영을 곁눈질했다.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차의재는 이사영과 여름까지 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봄 가기 전에는 어떻게든 떨쳐내야 하는데, 생존능력 0에 수렴할-이건 차의재의 편견이다- 애를 서울 밖에서 유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 해서 서울에 터를 잡고 살자니 그건 차의재가 안 된다. 문명사회에 적응할 마음이 없다.
근심하는 사이 사영은 배낭 안을 꼼꼼히 살폈다. 서원병원에서 떠날 때 어찌나 바리바리 싸주던지, 드는 게 일이었다. 황당한 점은 이사영보다 차의재의 짐이 더 무거웠단 거다. 우진은 물론이요, 그새 친목을 쌓은 서원병원 사람들은 의재가 하나를 말하면 열을 챙겨줬다. 저한테 주겠다고 기껏 발품 팔아 구해왔다는데 거절할 수도 없어서, 의재의 상반신만 한 짐가방이 꽉 찼다.
무슨 짐이 그렇게 많냐며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던 사영은 서원병원을 나오자마자 버릴 건 버리자며 의재의 배낭을 뺏어가 뒤적이기 시작했다. 사실 차의재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맞다. 이미 여러 번 해봐서 알기를, 국도를 타려면 기동성이 최고였다. 자전거라도 구해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는 게 낫다. 좀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차라리 업고 가면 어땠을까?
……아니야. 그 길은 빨리 걷고 싶지 않다. 끝에 다다르면 너를 두고 떠나야 하잖아.
“형 담배 끊은 거 아니었어요?”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차의재가 고개를 돌렸다. 담배 3갑을 한 손에 든 이사영이 나머지 한 손으로 배낭에서 무언갈 끄집어낸다. 음. 담배 한 갑 더.
“하은이 때문에 참은 거지, 끊은 거 아냐.”
“기왕 참아본 김에 아예 끊지, 왜요.”
“밖에서만 피울게.”
“밖에서? 담배 태우다가 시체 머리통 깰 일 있어요?”
생각보다 조심성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의재 입장에서는 피곤한 일이지만, 앞으로 밖에서 혼자 살게 될 이사영을 생각하면 괜한 변명을 얹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할 말은 차고 넘치는데, 꾹 참고 있으려니 이사영이 0.2미리 한 갑만 두고 나머지는 빼버렸다.
“야…….”
“난 담배 냄새 싫어요.”
“냄새 빼고 들어올게.”
“싫다니까.”
존나 완강하네. 병원에서 살던 애라 그런가, 지인이 폐암에 걸려도 T발언이나 뱉으며 속 긁을 것처럼 생겨놓고 안 어울리게 걱정이다. 차의재도 처음부터 담배를 달고 산 건 아니다. 곁에 누가 있어야 할 시간에, 곁에 있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하나씩 물다 보니까 이렇게 됐지. 때로는 몸 좀 상해가며 삶을 유지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담배 정도면 알코올이나 약에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온전하지 않나?
어쨌거나 한집살이할 동거인이 도저히 싫다는데 싸울 마음은 없다. 오래도 아니고 조금 더 참는 거니까. 남우진이 제 귀한 곳간을 털어 챙겨준 담배들이 아쉽게 됐다. 남우진한테만은 사양 한마디 않고 넙죽 받아온 게 화근이 됐다.
그사이에 짐 정리를 마친 사영이 한결 부피가 줄어든 배낭을 건넸다. 서원병원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그 많은 정성과 선의를 배낭에서 직접 꺼내 버린 인물은 여러분이 키우신 싸가지이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마시라.
많은 사람이 이사영을 만류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하은이네 삼촌 괴롭히지 말아라. 네가 노숙할 관상은 아니다 등등. 문장은 이렇게 생겼어도 같이 살아온 정이 있으니 이별이 아쉬워서 하는 말들이었다. 차의재의 목적지가 서울 밖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더 심해졌다. 자신이 언젠가 사람 패죽이는 꼴 보고 싶은 게 아니면 기회 될 때 보내라며, 이사영이 경고를 가장한 패악을 부리고 나서야 만류하는 소리가 쏙 들어갔다. 화살은 차의재에게 돌아왔다.
“우리 사영이 잘 부탁합니다. 애가 밖에서 살 놈은 진짜 아니에요. 의, 식, 주, 다 까탈스럽게 구는 놈이라……”
아니 그럼 방생하시면 안 되죠. 험상궂은 얼굴을 한 건장한 청년이 바짝 수그리며 사정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서, 차의재는 예, 하고 건성으로 대답만 하고 말았다. 배원우가 전혀 못 알아듣고 감사하다며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통에 더 골치 아파졌다.
어쨌거나 각오는 한 일이다. 올해로 28살 차의재는 제 말에 책임을 다하는 어른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약속을 무르려는 시도를 안 한 것은 아닌데, 별 핑계를 다 대며 으름장을 놓아도 고집을 안 꺾으니 별 수 있나. 줏대 있는 놈이었다.
그렇게 서원병원을 나와 일주일. 그의 제안대로 ‘같이 살아’본 결과, 차의재는 이사영의 평가를 밑바닥에서부터 두 계단 정도 상향 조정했다. 이사영의 심적 변화와는 정반대였다.
저 나름대로 뉴비 배려를 해주는 것 같긴 한데, 기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벽 있고 지붕 있으면 잠잘 수 있다니, 석기시대 야만인들이 살던 동굴도 벽이랑 지붕은 있었다.
처음에는 저를 돌려보내려 센 척하는 줄 알고, 사영은 어디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차의재의 객기에 ‘어울려’줬다. 다음 아침, 저만 거지꼴이 된 채 개운한 얼굴을 한 그와 마주할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차의재는 심지어는 서원병원에서보다도 더 안색이 좋았다. 생전 먼저 말 걸지 않던 주제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잘 잤냐?” 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간밤 잠을 제대로 설친 사영은 떨떠름해져서 물었다.
“형 노숙도 해본 적 있어요?”
“가끔. 해볼래? 빈집 찾기 귀찮은데.”
“…….”
“…밤하늘 보면서 자는 거 낭만 있어.”
“낭만은 무슨, 얼어 죽을……”
기껏 풀어졌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말본새하고는. 머리 붙일 바닥만 안 젖어있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차의재는 곱게 주인 없는 집을 찾았다. 그게 서원병원에서 가져온 마지막 패악이었다는 듯, 사영은 그 뒤로는 불만 한마디 없이 고분고분 잘 따라왔다. 심지어는 의재가 그를 이틀 굶겼을 때도 불편한 티 한 번을 안 냈다.
차의재는 끼니를 떼우나 마나 사람 옆에 가면 허기를 느꼈다. 이사영이랑 종일 붙어있는 데다가, 병원에서와 달리 정해진 밥 시간도 없으니 식사를 쉽게 까먹게 되는 것이다. 이사영이 약한 소리를 좀처럼 안 하는 탓도 있다. 그런 일이 꽤 자주 반복되자, 차의재는 식량 전반을 사영에게 인수인계했다.
“무겁네…….”
“가벼우면 내가 들었겠냐.”
“아끼길래, 우리 가난한 줄 알았지. 굶는 건 버릇이에요?”
“…….”
“으응, 힘들게 산 건 맞나봐…….”
태어난 이래, 지난 11년을 포함하여 단 한 번도 식량난을 겪어본 적 없는 차의재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졸지에 이런 취급도 받아보고, 진귀한 경험이다.
비단 그뿐만 아니었다. 이사영과 함께 걷는 서울은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게 새로웠다. 아무리 그래도 나고 자란 고향인데. 색이 다 바랜 추억을 더듬기보다는 아예 처음 보는 곳을 관광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1년간 무법지대의 왕처럼 살아온 의재에게 있어, 주인이 있는 건물과 물건이란 사뭇 낯선 존재다. 솔직히 그 옛날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너무 오랫동안 정상적인 사회에서 살지 못했다.
내가 이 싸가지보다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인정하기 싫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심심치 않게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면 정보나 물자를 교환하고 딜을 보는 사람은 이사영이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의재는 순순히 사영에게 대외 전반을 맡겨두고 널찍한 등 뒤에서 관심 없는 척 시간을 죽였다. 차의재가 사람과 마주하지 않기를 누구보다도 원하는 건 본인이었다.
타인을 향한 갈구와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한 두려움이 겹쳤다. 고정된 파티원 덕에 전자가 어느 정도 충족되니 후자가 존재감을 크게 발했다.
“형, 담배 필요해요?”
“남았어.”
“꼴초라더니, 별로 안 피우네.”
“너 때문이잖아.”
막 길을 떠날 때는 담배 냄새 싫다며 그렇게 질색한 주제에, 이사영은 실내흡연을 강요했다. 위험하게 밖에 기어나가 피울 바에는 창문 열고 피우라고 하던가. 아무리 허락을 받았다지만, 비흡연자 동거인과 같이 사는데 집 안에서 담배를 마음 편히 피울 수가 있나. 불 붙일 각을 재다가도 그냥 안 피우고 말지, 하는 생각에 집어넣게 됐다. 한 갑을 다 비우는 게 어려웠다.
“그럼 그냥 가요.”
사영은 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이렇게 서로 대충 견적만 재고 헤어지는 경험이 낯선 의재만 주춤주춤 아쉬운 걸음을 머뭇거렸다. 생존자를 만나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퍼주고, 양손 가벼이 제로부터 시작하는 게 차의재가 이제껏 살아온 삶이었다. 그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이 꼴이 된 세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처음 익히는 것 투성이였다. 도태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사영이 넌지시 물었다.
“형, 낯 되게 가리네요?”
“원래 그래.”
아무렇게나 둘러대 놓고, 차의재는 뒤늦게 사실 여부를 검토했다. 그러나 돌아봐도 거짓은 아니다. 중학교 때 같이 노는 친구가 적진 않았지만, 대체로 다 제 친구의 친구였다. 사람을 별로 가리지 않는 넉살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넓고 얕게 어울렸다. 그중에, 단둘이 남아도 마음이 편한 사람이 있긴 했던가?
아니, 뭐, 있기야 했겠지. 기억이 안 날 뿐이다.
“나한테는 별로 안 가렸으면서.”
단둘이 남아도 마음이 편한 사람이라.
차의재는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린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들키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왜 이 새끼한테는 처음부터 편하게 대했지? 첫인상이 너무 별로라 내숭 떨 생각이 안 들었나. 그렇다기엔 남우진한테도 예의 차리느라 한 대 후려 패질 못했는데?
“네가 기어올라서 그래.”
“뭘 기어올라요?”
“가슴에 손을 얹고 과거를 되돌아봐라.”
“아하.”
웃음기 어린 음성과 함께, 시선이 휘감긴다. 온몸에 드러난 살갗이라곤 얼굴과 손밖에 없는데, 저놈이 자신을 쳐다볼 때면, 어쩐지 발가벗겨진 것 같다. 아주 오래전에 다 들켜서, 더 숨길 것도 없는 듯한 느낌. 그럴 리가 없는데도.
“택시비가 꽤 쏠쏠하네…….”
“너 택시 타본 적은 있고?”
“있었겠죠.”
“잊었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몸으로 안 겪으면 소용이 없다. 그럼 교육은 왜 있어요?”
“배운 거야?”
작은 건물처럼 버티고 서 있는 저 철제 구조물의 바퀴가 언젠가는 이 도로 위를 굴렀었다는 걸, 글과 말로 배워야만 안다고? 차의재는 새삼스레 이사영과 자신 사이의 아득한 정신적 세대 차를 실감했다. 사람 하나 꼬셔 보겠답시고 내비게이션 노릇이랑 이것저것 해준 건 고맙긴 한데, 이거 범죄 아닌가? 따지고 보면 얘 하은이보다 어린 거 아니야?
“배웠죠, 형 말대로 잊었으니까. 형도 사람 대하는 법 다시 배워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다.
이사영과 차의재를 동일선상에 두는 건 불가능하다. 애당초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달랐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함께 걸을 수는 없으니까. 평생을 견디기만 할 삶에 누굴 모신다는 게 얼마나 염치없는 일인가. 함께하고 싶은 이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차의재는 같이 걷기를 권유할 정도로 뻔뻔하지 못했다.
살면서 사람은 많은 걸 잊는다. 개중에는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 있고, 영영 잊어도 좋은 것도 있다. 차의재에게 사람 대하는 법은 잊어도 좋은 것이다. 간단한 처세술만으로도 얄팍한 만남에는 대처할 수 있었다. 그 이상으로 발전해서는 안 됐다. 어느 겨울에 그러했듯 있는 힘껏 저 낙원으로 등을 밀어주어야 함을 안다.
차의재는 괜스레 버릇처럼 소매를 끌어내렸다.
차의재는 늘 묘하게 조급한 기색이었다. 대강 서원병원에서 멀어지면 그만인 이사영과 달리, 차의재에게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어디로 가는데요?”
“집 비슷한 곳.”
“……그게 뭔데요.”
“있어, 마음의 고향. 주기적으로 가줘야 해.”
“아는 사람 묘?”
“사이코패스 새끼. 왜 생각이 그렇게 튀어?”
“흔해 빠진 얘기니까. 주기적으로 갈만한 곳이 또 어딨는데요?”
그야 물론 많다. 독립한 성인이라면 본가가 있고, 현대인이라면 병원에서 정기검진도 받아줘야 하고, 마음의 고향 따위가 아니라 진짜 태어난 고향이라던가, 아니면 즐겨 찾는 취미 공간 같은 곳-영화관 따위-을 떠올리지 않나. 그러나 차의재는 곧 그 모든 공간이 11년 전을 기점으로 사라졌음을 실감한다.
틀린 말도 아니어서, 의재는 반박의 의지를 잃었다. 남우진에게서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이후로, 그는 소년이 제 환상이었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니 기억도 영 믿을 만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런 얌전한 좀비는 그 애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므로, 이쯤 되면, 있었더라도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애먼 좀비 하나를 묶어놓고 사육했다는 편이 더 현실성 있다.
왜, 그 여자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나.
차의재는 아직까지도 그 일만 떠올리면 가시가 박힌 채 방치되어 퉁퉁 부은 살을 건드리기라도 하듯 심히 아팠다.
그가 종종 들러서 부은 눈가를 한 채 나오게 되는 그 캠핑장은 어찌 보면 그의 상상친구가 죽은 묘나 다름이 없다.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안녕을 빌어주는 행위는 추모와 닮지 않았던가.
사영은 미세하게 일그러진 차의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타인과 같이 살아본 적 없다는 인간에게 얼마나 더 바랄까. 사실 이 정도도 의외다.
다수에 섞여드는 것도, 여럿이 함께하는 것도 아닌 오직 단둘이서 서로의 24시간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멀쩡한 사람 둘이어도 죽일 듯 싸우고 파탄이 나기에 십상인데, 선천적 인성파탄자 이사영과 독고다이 11년 차 차의재의 관계는 기이할 정도로 순항했다. 서로 특별히 조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들은 재깍재깍 잘 싸웠다. 하도 싸우다 보니 서로 웬만한 욕지거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게 되었으며 갈등이 몸집을 불리지 못했다. 어쩌다가 싸움이 격해져도 각자의 방에서 하루 정도 머리를 식히고 나면 쉽게 사이가 원상 복구됐다.
이사영은 까다롭지 않은 동거인이었다, 생각보다는. 애당초 부딪힐 일이 별로 없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그는 거처를 마련할 때는 공간이 독립되는지를 필수로 짚고 넘어갔으며, 쉬어갈 때면 자기 방에 쏙 들어가서, 의재 주변을 성가시게 맴도는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차의재의 방문 앞에서 들어가도 되냐고 한 번 물어볼까 말까였다. 숨길 게 많은 의재의 입장에서야 언제나 다행인 일이었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느라 깊게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을 추스르고 재정비하기에 급급해서, 그럼 이 시간에 너는 뭘 하고 있을까, 그런 고민은 안 해봤다. 애당초 방 두 개짜리 집을 고집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조금 솔직해지자면, 이사영의 방문을 열며 차의재는 환대를 기대했다.
“야. 마, 트…… 어, 미안.”
사과와 동시에 문을 닫았다. 그래, 제가 생각하기에도 노크 한번 없이 남의 방문을 벌컥 연 건 좀 무례했다. 아니, ‘남‘의 방문을 열 일이 있었어야지! 목 뒤에 달라붙는 공기가 언뜻 축축하다. 차의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문손잡이를 잡은 채 이사영의 방 앞에서 한참이나 굳어있었다.
차의재가 이사영과 눈을 마주친 시간은 2초 남짓. 그러나 상황을 인지하기에는 충분했다. 마주친 눈동자가 딱 한쪽이었으니까. 뇌보다 빠르게 굴러간 시선이 이사영을 자연스럽게 훑고 내려가, 나머지 하나를 발견해냈다. 희고 창백한 손가락 사이에서, 보랏빛 동공 하나가 빼꼼 가장자리만 비췄다.
하긴, 아무래도 몸에 넣는 건데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줘야겠지. 그런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봤지?
그렇게 한참이나 심란하게 서 있으니, 어느 순간 잡고 있던 문고리가 불쑥 제 쪽으로 밀려왔다. 의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문고리를 놓고, 뒤로 두어 발짝 물러섰다. 그래도 이사영은 알아봤을 것이다, 차의재가 제 방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던 것을.
“마트 같이 가자고요?”
좀 전에 무슨 일이 있긴 했었냐는 듯, 태연한 목소리였다.
“어, 응. 미안.”
“미안할 것까지야.”
이사영은 한쪽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팔꿈치를 반대쪽 문틀에 걸치고 있었다. 덩치 있는 몸이 그러고 서 있으니 방이 거의 가려지다시피 했다.
묻고, 캐내고, 추궁하길 좋아하는 놈인 주제에 자기 얘기는 좀처럼 안 한다.
말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알겠는가? 입만 열면 재수 다 뒤진 소리나 뱉어대며 비아냥대기 일쑤인, 싸가지 다 팔아먹은 이 새끼의 여유가 사실 근거도 뿌리도 없는 허상의 것인 줄 누가 알아보겠는가? 그의 인생이 3분지 2가 감히 살필 엄두도 나지 않는 미궁이며, 그것의 나머지 3분지 1은 멀쩡한 단서라곤 하나도 없는 아리송한 실루엣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이었다고, 누가 알아주겠는가?
벌써 알고 지낸 날이 꽤 되는데, 이 말을 해본 적 있던가.
“방 좀 들어가도 돼?”
치켜뜬 눈꺼풀 아래서 두 눈이 반짝였다. 방금 막 닦아서 그런가, 섬세하게 붓칠하여 유광제로 마감한 눈동자는 사람 눈이라기엔 지나치게 영롱하다. 가느다랗고 촘촘한 속눈썹의 그늘이 반쯤 잡아먹은 눈동자는 홍채의 결이 대리석의 섬세한 무늬처럼 얇고 정갈하다. 반대편 눈동자가 꼭 같은 모양새로 찬란하게 반짝이지 않았더라면, 바로 가짜인 줄 알아보았으리라.
이사영의 눈동자는 이질적이다. 의안의 인공감을 뜻하는 게 아니다. 마주 보고 있으면 그의 온 세상이 ‘나’로 한정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하는 시선이라고, 차의재는 생각한다. 묵직하고 유연하게, 잡아먹을 듯 덮쳐온다. 뱀을 앞에 둔 것처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형이 먼저 치근덕대는 날도 오고……. 왜요? 이거 때문에?”
톡, 제 눈가를 찍은 사영이 보란 듯 시선을 돌렸다. 한쪽 눈만 굴러가고, 나머지 한쪽은 멀뚱멀뚱 자아 없이 의재를 바라보는 그대로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의안 쓰는 거 알고 나서부터 묘하게 잘해줬었죠, 형.”
마주 본 얼굴이 아교를 한 차례 먹인 듯 딱딱하게 굳었다. 불편함을 느끼려나. 이사영 역시 이렇게 노골적으로 제 의안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그 외처럼.
이사영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목을 끌었다. 자연히 사람이 꼬이는 류의 인간인데, 요구하는 사회적 에너지가 높지 않아서. 그는 늘 인간관계에 아쉬움 없이 살아왔다. 타인의 선 주변을 기웃거린 적이나, 그 안에 들어서고 싶은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타인의 밀접한 이가 되는 방법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하길, 사람이 어디 건물이던가?
“들어와요.”
요컨대 나에게 당신을 들이면 당신 역시 나를 들일 수밖에 없겠지, 하는 것이다.
“형도 아는 편이 좋을 것 같으니까.”
“뭘?”
“이거, 관리하는 법.”
“……내가?”
“여기 남우진도 없는데 형이라도 알아야죠.”
사실 남우진한테도 맡긴 적이 손에 꼽는다.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웬만해선 이사영은 결코 타인에게 제 눈이 의안이란 사실을 상기시킬 만한 행위는 일절 삼갔다. 요즘 세상에 팔다리 한쪽 없는 게 별 대수 아니듯 네 눈 한쪽 가짜인 게 뭐 그리 숨길 일이냐 되물을 수도 있다. 물론 이사영은 매일 아침 마주하는 제 오른쪽 눈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별일 아니다, 아무도 너한테 관심 없다, 그렇게 떠들어대는 그 입들이 외려 그의 눈을 더 신경 썼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살만해지니 남의 인생에 같잖은 오지랖을 다 부리지. 이사영은 그 연민 섞인 언행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 사정을 까맣게 모르는 차의재만 심란해진 얼굴로 이사영의 앞에 고분고분 마주 앉았다. 그래.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애 손가락이라도 한쪽 부러져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단 말이 있다. 저가 고양이보단 낫겠지, 아무래도…….
“손 줘봐요.”
길쭉한 손가락이 문지르듯 손등을 쥐고, 들어 올렸다. 타인의 의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제 손끝이 한 겹 반듯하게 주름진 얇은 눈꺼풀 위로 점점이 스쳤다. 엄지가 시작되는 손바닥의 언덕 위로 엷은 숨이 내려앉는다. 검고 가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톱 위를 덮었다.
얼굴과 얼굴로부터 단 한 뼘 거리. 흐릿해진 시선이 사붓이 내리깐 반대편 눈부터, 매끄럽게 굴곡진 뺨과 평평한 이마, 곧은 콧대 따위를 더듬고 지나갔다. 무언가를 설명하는 듯 나긋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숨 막히게 차오른 상념에 흔적도 없이 묻힌다.
꼭 이런 자세였다. 저가 앉혀둔 바로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소년의 앞에 가서 편하게 자리를 잡는다. 몸을 굼실거려 조금 더 붙어 앉는다. 허리를 살짝 앞으로 굽히고 고개를 앞으로 숙인 다음, 거즈를 고정한 테이프를 살갗으로부터 조심스레 떼어낸다. 혹시라도 그때 손톱에 긁힐까 걱정돼서 차의재는 늘 손톱을 둥글게 갈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파일을 들고 한참이나 사포질을 하다가, 종종 소년의 손을 붙잡고 사포질을 해줄 때도 있었다. 너 손 크다. 나랑 비슷한 거 같은데. 그런 소리나 지껄이면서, 손톱이 단정해진 손 두 개를 가만 맞붙이면서, 결코 혼잣말이 될 수 없는 물음을 뱉는다.
“나중에 손톱 자라게 돼도 이대로 관리해라, 응?”
손가락 사이사이로 검고 가는 머리카락이 보드랍게 덮쳐오는 감각을 즐긴다. 나는 이 시간이 정말로 좋다고, 너만 있으면, 어디 하나 멀쩡한 곳 없는 내 인생도 어디까지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형?”
느슨하게 뻗은 손가락의 옆면을 무언가가 핥듯이 스쳤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린다. 이지 없는 보랏빛 눈동자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
이거 바닥에 떨구면- 아, 씨발, 당연히 안 되겠지!
다급하게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공손하게 모은 손 위로 납작한 물체가 살포시 놓였다.
“아…. 야, 미안. 다 흘려들었어.”
“……무슨 생각하느라?”
“몰라. 나 이거 잡아도 돼?”
“그냥 플라스틱이에요.”
그냥 플라스틱, 그렇게 들어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차의재는 가장자리를 최대한 조심스레 들어 살폈다. 사람 눈꺼풀 아래 있던 것이라 그런지 뜨뜻미지근하다. 이렇게 표현하긴 뭐하지만, 굳은 수제비 반죽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생김새가 구형이 아니다. 구슬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 울퉁불퉁하게 굴곡진 가장자리에서부터 선홍빛 혈관이 섬세하게 뻗어 올라와, 홍채의 흐릿한 띠까지 연한 빛깔로 감쌌다. 각도에 따라 어른어른 비추는 반사광이 이사영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엄밀히 말해 이것도 틀림없이 이사영의 눈이다. 그것이 차의재의 손에 들려있었다. 제 신체 부위나 다름없는 것을 남의 손에 맡기는데, 그 타인이 엄한 데 정신이 팔려있으면 기분이 나쁠 만도 하지. 의재는 아직껏 아득한 정신을 있는 힘껏 현실로 당겨왔다.
“어떻게 해, 이제?”
“알아서 대충 닦아요.”
좀 전의 홀대가 아직도 못마땅하지, 성의 없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아니, 누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생겼는데, 지금! 차의재는 거의 신줏단지 모시듯 양손으로 남의 눈을 곱게 받쳐 든 채 굳었다. 의재의 기준으로 대충이란 거추장스럽게 긴 소매의 끝단으로 벅벅 문질러 닦는 것이다. 그게 정답일 리 없다.
심각해진 표정을 보다 못한 이사영이 들으란 듯 한숨을 푹 내쉬며 그 손에서 의안을 집어 갔다. 쥐면 터질까, 불면 꺼질라, 귀하게 모시던 제 손길과는 사뭇 달라 차의재는 저도 모르게, 야, 위험하게. 하고 볼멘소리를 하려다가 꾹 참았다. 누가 누구한테 훈수를 둬.
“형 되게 웃긴 거 알죠. 관심 1도 없는 것처럼 시큰둥하게 있다가, 갑자기 무슨 폭탄 떨어진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게.”
“뭔 폭탄이야. 비싼 거 같으니까 조심한 거야.”
“으응, 귀한 거긴 하지. 남우진도 꽤 어렵사리 구한 거랬으니까.”
젖은 거즈가 광택 도는 의안 위를 연신 문질렀다. 차의재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미 한차례 얻어맞은 듯 얼얼한 의식에 한 번 더 충격을 가하고 싶지 않아서다.
“징그러워요?”
“뭐?”
“얼굴을 못 보네.”
차의재는 새하얀 거즈에 감싸여 저를 올려다보는 의안과 눈을 마주친 채 차분히 심호흡했다. 이 새낀 말을 좆 같이 하는 재주를 타고났어. 사람 얼굴을 두고 징그럽네, 마네. 적어도 차의재는 남의 면전에 대고 그따위 개소리를 지껄일 쌍놈은 아니었으며, 진심으로, 이따위 것을 역하다고 여길 정도로 비위가 약하지 않다. 곱게 자라니까 겨우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떨지. 질식시킬 듯 폐 안을 빼곡하게 메웠던 과거는 온데간데없이, 분노가 새하얗게 속을 태웠다.
고개를 든 차의재는 충동적으로 이사영의 멱살을 잡고, 단숨에 바로 앞까지 바짝 끌어당겼다. 코끝이 마주칠 듯 가까운 거리에서, 놀란 듯 반쯤 올라간 눈꺼풀 아래 살굿빛 막이 보인다.
그려 넣은 혈관이 아니라, 맥동하는 사람의 혈관이다. 자각하기 무섭게 잊고 있던 단 향이 밀려왔다. 억울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고개를 뒤로 물리면, 얜 꼼짝없이 내가 자기 눈이 징그러워서 피하는 줄 알 거 아냐. 차의재가 썩어들어가는 거뭇한 눈을 매일 같이 소독해주던 놈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탓하듯 물으니 사영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성낼 놈이 따로 있지, 그래. 네 입장에선 그렇겠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말들이 혀뿌리 아래까지 울컥 치밀며 바깥을 넘봤다.
“형이 좀 알려주지 그래요? 내가 뭘 모르는지.”
“내 비밀 비싸.”
“인생사에 귀천이 어딨어요? 내 사정은 알 거 다 알면서 혼자만 꼭꼭 숨겨, 치사하게.”
“알긴 뭘 다 알아? 네가 사람 하나 찾는 앵무새인 거밖에 몰라.”
“그거 알면 다 안 거죠. 난 평생 그거밖에 안 하고 살았어요.”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싶을 정도로 뻔뻔하게 밀어붙인다. 서원병원 사람들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네가 누굴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려줄 성격이냐, 하며 코웃음이나 치고 말았겠지. 진심인 줄 아니까 차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의재는 속수무책으로 말리다가, 익숙하게 한 발짝 물러섰다.
“날 더워지면 얘기해줄게.”
물론 그럴 마음은 쌀알 한 톨만큼도 없다. 그 전에 튀면 그만이지. 이사영한테 이 비밀을 공개한다고? 언제 서원병원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애한테? 그럼 겨울마다 박하은과 할머니를 만난다는 차의재의 인생 계획이 일그러진다. 어디까지나 그곳 사람들에게 ‘인간‘을 완벽하게 연기한다는 가정 아래서만 성립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차의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저 같은 위험분자를 노약자 옆에 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사정을 안 서원병원 사람들이 그를 막지 않는다면, 고맙기야 하겠지만, 그들의 한참 부족한 경계심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 애매한 기준은 뭐예요?”
“그럼 6월.”
“일주일도 더 남았잖아요.”
“시간 금방 가.”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차의재의 봄과 가을, 겨울은 늘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고, 여름은 숨 막히도록 느렸다. 특히나 늦봄의 일주일이야 눈 깜빡하면 사라지는 시간 아니던가.
이런 대화,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차의재는 이제껏 그래왔듯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
다 티가 난다. 속내를 숨겨본 경험 자체가 적은 건지, 아니면, 이런 얄팍한 수에도 모르는 척 속아주는 이들만 만나 온 건지.
서원병원에서 수도 없이 많은 도둑놈 새끼를 만나 온 이사영에게 이별의 낌새란 기민하게 잡아 족쳐야 할 알람이다. 도망치는 이들 특유의 긴장과 서글픔, 망설임이 차의재의 얼굴에 내내 어려 있음을 몰라볼 수 없다.
바깥에 익숙하지 못한 내가 당신에게 너무 큰 짐이 됐나? 차라리 그런 이유라면 이사영에게는 해결책이 있다. 그의 홈그라운드인 서울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르도록 유도하는 것. 문제는 그렇게 알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답은 뻔히 알 것 같은데, 풀이는 전혀 감이 안 잡힌다. 그래서 아무리 답을 확신해도 보란 듯 써낼 수가 없었다. 차의재란 사람을 다 아는 것 같다가도, 당신 말대로 하나도 모르는 것 같다.
사영은 추궁하지 않았다. 추궁하거나 캐묻지 않아도, 약속한 대로 잠자코 기다리면 당신이 먼저 내게 입을 열어주길 바랐다. 믿음은 아니다. 이사영은 소위 낙관주의자라고 불리는 꽃밭들과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품어봐야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별 볼 일 없는 희망을 밑돈으로 깔아두고 체념한 채 기다리는 것이다. 이사영의 기다림은 그렇다.
신경을 첨예하게 곤두세운 채 버티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애쓰지 않아도 이사영은 대체로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당신이 아무렇게나 둘러대느라 가볍게 뱉은 한마디도 오래도록 기억하고, 어렵지 않게 도망갈 수 있다는 당신의 자만이 우스울 정도로 당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디 가요?”
“……담배 피러.”
“퍽이나.”
“진짜야. 손에 담배밖에 없어.”
“그러게요. 그것만 가져갈 생각이었나 봐. 자신감이 대단하네….”
5월의 마지막 밤, 이사영은 밤 치곤 미지근한 공기가 흐르는 현관문 앞에서 차의재를 마주 보고 섰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주제에 뻔뻔스레 거짓말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차갑게 식었다.
대체로 약속이란 자신의 생각보다 가볍게 여겨지는 것이라고, 이사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무언가의 가치가 모두에게 동일했다면 가치관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겠지.
또한 그가 이사영에게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다. 그들은 단지 잠깐의 동행을 합의한 사이에 불과했다. 차의재가 지킬 약속은 딱 하나뿐이다.
약속했지. 그럼 그 약속을 지키고 나면? 당신의 밑바닥까지 다 억지로 듣고 나면, 이 밤이 지나고 달 앞에 새 번호가 오면, 그럼 당신은 영영 날 떠날까.
“사영아, 우리 좋게 끝내자.”
그렇게 쉽게 끝낼 수 있는 것이었던가? 당신한테는 그런가?
“이럴 때만 이름 부를 거면 그냥 부르지 말지 그래요? 듣기 역하니까.”
“좋게 끝내자고.”
“뭘 좋게 끝내. 내 기분이 좆 같은데.”
차의재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꼰대 기질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 자식이 어쩌다가 잘 쓰던 존대 어미까지 팔아먹을 정도로 빡돌았는지 그 감정선이 의재의 입장에서는 짐작도 안 갔다. 표정 살벌한 거 봐. 잘못하면 한 대 치겠네. 처맞을 걱정은 없어도, 체격 차를 고려하면 설렁설렁 봐주긴 글렀다. 요컨대 차의재는 진심으로 이사영을 패고 싶지 않았다.
“당신 정말…… 사람을 하찮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저음이 느린 템포로 나른하게 흘러나온다. 커다란 손바닥이 수심 어린 얼굴 위를 덮는다. 서늘한 달빛이 푸른 핏줄이 돋은 손등에 내려앉았다. 많은 게 창백했다. 달도, 이 밤도, 손등도, 이사영의 표정도, 그를 더듬는 차의재의 시선도.
이미 가려진 얼굴인데도 의재의 시선이 하염없이 그의 손등 위에 머물렀다. 찰나의 순간 보았던 표정이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했던 까닭이다. 의재는 저 얼굴을 알았다. 거울에서만 자주 보았던 검고 축축한 우울이 남의 얼굴에 앉아 있다. 손 한 번 대지 않았는데도 이사영은 이미 아파 보였다.
남한테 상처받은 경험이나 있지, 남한테 상처를 준 기억은 드물다. 기껏해야 최근에 박하은 정도였는데, 그건 우울보다는 설움에 가까웠다. 이렇듯 은밀하고 성숙하지 않았다. 차의재는 누군가를 우울하게 만들 정도로 소중하게 여겨진 기억이 없다. 타인과 밀접한 관계를 쌓아 올리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늘 짧았다.
같이 살아볼래요, 하는 제안을 어영부영 받아들일 때마저도, 이사영이 자신을 위해 화내고 울어주는 것은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가 서원병원에서 하루 이틀 지낸 것도 아니고, 아마 아득히 많은 추억이 있어야만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생각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욕심내는 줄 알면서도, 의재는 차마 기회를 걷어찰 수가 없었다.
그때 차의재가 욕망했던 그것이 바로 여기 있다.
이유를 묻고 싶었다. 내게 관대한 이유를, 나를 형이라 부른 이유를, 날 따라온 이유를, 나와의 이별을 아파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그 모든 이유를 듣고 싶지 않았다. 원리를 알아야 나중에도 몇 번이든 다시 가질 수 있을 텐데, 분해하고 탐구하기엔 벅차도록 애틋하고 귀했다. 그저 하염없이 품에 안은 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떠나기도, 망가트리기도 싫다.
“사정이 있어……”
어떻게 안 될까, 가령 우리 가을에 다시 만난다거나. 그렇게라도 이어보면 안 될까? 이곳에서 이사영이라는 인연을 매듭짓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과거에 남기고 온 수많은 매듭과 같이 그렇게 유산처럼 송곳처럼 또한 여느 눅눅한 초여름처럼 만들고 싶지 않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다고.”
“들어 봐. 나한테 하자가 있어, 좀 커.”
“하자, 뭐요.”
“네가 알면 나한테 쌍욕 박고 짐 싸서 도망칠 그런 거.”
사영은 그제야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다행히 상처받은 기색은 꽤 가신 낯이었다.
“어이가 없네……. 나보곤 사람 지레짐작하지 말라고 그렇게 정색한 주제에, 왜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어요?”
상처받는 게 무서우니까. 이 삶에 상처가 끊이지 않는다면, 적어도 예상한 아픔만 겪고 싶었다. 고독은 사람을 상념에 빠트리고, 외로움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차의재는 아주 오래 우울한 상념에 빠져 지냈다. 무너지지 못할 이유라도 억지로 쥐어졌더라면 또 몰라. 책임질 거라곤 제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삶이었다. 그래도 꼴에 죽고 싶지 않아서, 차의재는 옆에 아무도 없이 매미 우는 소리만 나는 계절이 오면 지금껏 받은 상처와 앞으로 받을 상처의 깊이를 재고 따지고 겨누어보며 앞으로의 불행한 전망을 자꾸만 그렸다.
“그럼 이렇게 해요. 형은 나한테 그 사정인지 뭔지 까고, 나는 형이랑 여름 동안 같이 살아주는 걸로. 밑지는 장사도 아니잖아요. 어차피 말해주기로 했던 거였으니까.”
……아, 그거?
한순간 암울한 안개가 싹 걷히고, 섬뜩한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차의재는 우선 표정을 갈무리했다. 잊고 있었다. 지킬 생각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지킬 생각 없었다고 실토하면 또 얼마나 노발대발할지 감도 안 온다.
“잊고 있었죠.”
“…….”
“으응, 다들 쉽게 잊더라. 머리가 나쁘면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해요.”
눈매를 나른하게 접어 휘는 얼굴이, 궁지에 몰린 쥐새끼를 앞에 둔 고양이 같다.
어쩌면, 의도됐나? 어디서부터?
“됐으니까 약속 지켜요.”
“……너 그 말 후회한다.”
“후회를 해도 내가 하니까, 그만 피하고.”
숨기면 숨기는 대로, 알리면 알리는 대로 문제가 된다. 차라리 전자가 낫단 걸, 차의재는 아주 여러 번 아파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러니 이제 그만 덜 아프고 싶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마주 서고 싶은 이유는 뭘까. 이 자식 말대로 내가 진짜 머리가 나쁜가.
아니. 그냥 차의재가 믿음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라 그렇다.
다른 말로는 희망이라 한다. 아무리 배신당하고 속아도 자꾸만 마음을 주었다. 속아준다는 변명 아래서 진심 된 기대를 걸었다. 그는 언제나 존재의 유무도 확신할 수 없는 어느 낙원을 찾아 걸었으며 밤 너머의 아침을 꿈꾸었고 초면의 누군가에게 다정함을 바랐다.
사람은 흔히 냉소를 동경한다. 기대하지 않고 꿈꾸지 않는 비관주의자들은 대체로 어떤 고난이 닥쳐도 무덤덤하고 태연해 보여서, 짐짓 아주 굳건한 듯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생이란 길고 긴 길을 걸으며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래, 잘 걸으려면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아주 많이 넘어지고, 아주 많이 다시 일어서야만 거기에 익숙해질 수 있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피해서는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관주의자를 동경하면서도,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낙관주의자에게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무너져내릴 때의 아픔을 알고도 걸어 나가길 포기하지 않는 그들을, 막막하기 그지없는 인생을 걷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하기 마련이다.
지금도 그렇다.
사영의 시선이 벗은 몸 위로 낭자한 자국들을 느리게 훑었다. 이쯤 되면 현실성이 없다. 입체감을 확인하기 위해 무심코 손을 뻗게 된다. 담색 홈에 손끝이 툭, 걸렸다. 어떤 기괴한 취향의 예술인이 조각한 현대미술처럼, 각양각색의 이빨 자국이 목부터 바지 허리둘레 아래까지 새겨있다. 이만한 흉이면 좀비가 되니 마니를 떠나 살아있는 게 이상하다. 단기간에 나진 않았겠지. 아마 11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늘려온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만 해본다.
자신이라면 솔직해질 수 있었을까, 하고 자문해본다. 아무래도 불가능하다. 사영은 8년 동안 자신의 먹먹한 꿈 얘기조차 누구에게 할 수가 없어 한참 아리송한 묘사나 하며 억지를 부려왔다. 자신의 약점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나의 일부를 뜯어 상대에게 내어주는 것과 같다. 그것을 귀히 아껴줄지, 찢어발길지는 상대에게 온전히 맡겨두고, 인간의 선의를 믿으며 불확실함을 오직 견디기만 하는 것은 얼마나 불안한 일인가. 사영은 그럴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끝이에요?”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추하게 질투하고, 짓밟을 성격도 아니다. 찬란한 이들에게 이끌리는 흔한 불나방처럼 당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뿐만은 아니다.
나는 당신의 답 없는 믿음이 헛되지 않았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멍든 마음을 지닌 이 시대의 인간 전부를 믿어, 마냥 배신당하고 상처받기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면- 나는 그중 단 한 명, 유일한 예외가 되고 싶다.
이사영은 그 누구도 모르는 차의재의 여름을 원했다.
차의재가 알기로 현 상황에 통용되는 ‘백신’은 항체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몸을 점령한 좀비 바이러스를 죄 족치고, 쓸모를 다하면 깔끔하게 퇴장한다. 즉 다시 물리면 도루묵이다. 그리고 이건 서원병원 출신 이사영이 훨씬 잘 알 테다.
“미친 새끼야! 안 치워, 이거?”
“침 그만 묻히고 물어요, 축축하니까.”
“네가 손을 치우면 되잖아!”
아무래도 이 새끼는 미친놈이다. 무증상-이마저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보균자에게 물리면 감염이 되는지 안 되는지 직접 확인해보자고? 제정신인가? 차의재는 11년 내내 그딴 건 실험할 엄두도 못 냈다. 임상시험 대상자를 구할 생각도 안 해봤다. 그런 짓은 당연히 하면 안 되니까!
서늘한 손이 이빨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이빨에 얇은 거죽을 밀어붙였다. 턱이 뻐근한 건 둘째치고, 혀에 닿는 살결이 소름 끼치게 부드럽다. 향이, 가까이 앉기만 해도 숨 막히게 조여오던 단향이 머리를 매캐하게 흐트러트렸다.
“그럼 뭐, 저 멀리 대전쯤 가서 물 거예요? 집이랑 가까울 때 확인해보고 가야지.”
“안 물어!”
“아하……, 평생 손만 잡고 자자고? 날 점잖게 봐주는 건 고맙긴 한데, 그럴 생각은 없어서요.”
뾰족한 송곳니에 연신 힘을 줘서 눌러대던 손가락이 경로를 바꿨다. 엄지와 검지가 혓바닥을 쥐어 천천히 문지른다. 그의 말대로, 사람 입 안이니까 물론 축축했다. 차마 넘기지 못해 고인 타액이 입안을 침범한 손이며 입술까지 번드르르하게 적셨다.
혀에 감기는 이 감각의 이름이 무엇인지, 차의재는 오래 고민했다. 고운 입자들이 나른하게 녹아 미뢰 사이사이에 유연하게 흐르고, 부드럽게 압박해온다. 지문이 연신 문지르는 혓바닥의 어느 부분이 텁텁하다.
후각은 미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얄려져 있다. 하나의 감각 기관이 한 개 이상의 다른 감각 기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공감각이라 하는데, 이러한 공감각을 가지지 않은 경우라도, 이와 비슷한 연상 작용을 겪는 사례가 많다. 일례로, 미각을 상실한 환자에게 주황색 음식을 먹이면 당근 맛을 느꼈다고 답변한다던가, 하는 등의 일이다. 또한 시각 정보 이상으로 훨씬, 후각 정보는 미각적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러니 이건 달다, 그렇게 이름 붙이는 게 맞겠지. 명명된 감각이 순식간에 존재감을 불려 사고를 장악했다. 끔찍하게 달았다. 피가 쏠린 귀끝이 따끔거린다. 이, 발랑 까진 새끼가…….
결국 차의재는 이사영의 이마에 두 번째로 손을 댔다.
*
신분제가 폐지된 21세기, 현대 사회는 지치지 않고 인간에 급을 매겼다. 그들의 혈통 따위로 갈리던 근현대 이전과 달리, 자본의 크기가 인간의 계급을 결정했다. 인간의 귀에서 태그가 떼어진 것은 10년 조금 더 된 일이다. 그마저도 자아 있는 인간들에게만 허락된 평등이었다. 말 못 하는 시체들은 여전히 타인에 의해 재단됐다. 얼굴만 봐도 신원이 특정되는 유명인, 권력자의 지인, 연고자가 있는 시체.
그렇게 한 계단씩 내려온 끝에, 현재 거리에 남은 건 누구도 모르는 사람들 뿐이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백신을 투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수많은 고학력자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대량생산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지만, 거리에 즐비한 이 이름 없는 시체들한테까지 백신을 다 투여하다가 품귀 현상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하나. 그렇게 좀비는 좀비로 남았다. 그들은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낮은 치안의 골치 아픈 원인이었다.
이사영이 백신을 투여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당시의 상황 덕분이다. 입 바로 앞에 손을 갖다 대도 입질을 안 할 정도로 온순한 좀비가 그 철문을 부서져라 쳤을 리 없다. 저 스스로 재갈을 물고 두 팔을 뒤로 돌려 묶는 건 더 말이 안 됐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서원병원에 좀비를 유기했단 것은 그 의도가 빤히 보이는 행위였다. 남우진에게는 이러한 노골적인 도움의 신호를 무시하지 않을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 구제의 결과를 봐줄 사람이 없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사영은 저 밖의 무연고자들을 볼 때면 기분이 잡쳤다. 제 처지가 저들과 별반 다를 것 없단 생각이 들었다.
“……눕자.”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 이사영은 얼굴을 절반 넘게 가렸던 후드를 내렸다. 한층 넓어진 시야와 예민해진 청각에 희미한 인기척이 잡힌다. 짐승도, 인간도 아닌 무언가가 주변을 헤매는 소리가 들렸다. 드문드문 보이던 정류소까지 자취를 감추자 정말로 넓게 뻗은 아스팔트 길과 양옆으로 굽이굽이 요동치는 산뿐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풍경인데 눈에 잡히는 모든 요소가 기분 나빴다. 이 한적한 곳에서 명을 다한 시체가 이따금 기어 오는 것도 영 불쾌하다. 도시에 있는 것들은 봐줄 사람이라도 있지, 이것들은 대체 여기서 얼마나 홀로 떠돌았을지 모르겠다.
도무지 눈을 못 맞추는 차의재에게, 사영은 너른 자비를 베풀어 비아냥댔다.
“낭만 챙기자고요? 로맨틱해 죽겠네.”
“어. 별 구경해.”
이상한 사람이야. 조금 성질을 자극당했다고 언제 주눅 들었냐는 듯 독기를 바짝 올리고 대꾸한다. 단정하게 생겨선 성깔이 보통 성깔이 아니다. 자꾸만 속을 뒤집어놓는 사방에서 그를 대할 때만 유일하게 숨통이 트였다.
차의재는 주차된-중앙선을 비스듬히 막고 선 것도 주차라면- 차의 보조석 문을 손쉽게 뜯어냈다. 시트를 뒤로 끝까지 젖히고, 뒷좌석 바닥에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놓는다. 퍽 익숙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차의재는 웃통을 깠다. 눕자면서?
이사영은 반사적으로 티셔츠 밑단을 잡고 훌렁 들어 올리는 손목을 잡아 저지했다. 반쯤 드러난 복부에 자석처럼 돌아가는 시선을 억지로 잡아 세웠다. 이사영은 무심코, 제 눈을 관찰하던 눈빛들을 떠올린다. 남이 제 약점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안다……. 제 시선은 그러한 것들과는 목적이 사뭇 달랐지만, 어쨌든 받아들이는 쪽은 유쾌하지 않을 테니까.
“뭐, 왜?”
정작 저쪽은 아무래도 다른 걸 걱정하고 있다. 저지당한 와중에도 이것이 성적인 시그널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걸 보면, 다른 데 정신이 팔렸다는 게 손쉽게 예측이 간다.
“누가 할 소릴. 형 옷 벗고 자는 버릇 있어요?”
“그딴 거 없어. 그냥, 옷 바꿔입자고.”
“형 옷을 내가 어떻게 입어요. 안 맞아요.”
“너랑 나랑 체격 차이 그렇게 안 심해.”
“눈 없어요?”
“…할 말이 많은데, 내가 존나 참는다. 진짜.”
“으응, 한쪽밖에 없는 나보다 심한 것 같길래. 왜 바꿔입는데요?”
“자다가 좀비 꼬여서 깨면 빡치니까.”
“뭔 상관이지.”
“너 냄새 나.”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아도 진의를 알 수 있었다. 의재는 당장이라도 벗어 던질 듯 잡고 있던 티셔츠를 놓고, 손을 설렁설렁 휘저었다.
“됐다, 그럼. 방법이 이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손을 내저을 때마다 팔뚝에 연한 회색빛으로 그어진 줄들이 함께 흔들렸다.
“답 없네, 진짜……”
“또 뭐가?”
“벗어요.”
차의재는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하여간 같은 소리를 해도 이 자식 목소리로 발음되면 묘하게 음흉하다. 분명 발화자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 아리송해진 표정에 사영이 나지막이 웃었다. 어디 이상한 곳을 한참 헤매더니, 비로소 저와 같은 난관에 봉착한 모양이다.
“왜요?”
“고개 돌려.”
“지금까진 막 벗었으면서?”
“너 하는 꼴 보니까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변태 새끼야.”
“으응, 황송하네.”
*
달빛은 거슬릴 정도로 희고 공기는 눅눅하다. 이사영은 어색하게 밀려 올라오는 옷 밑단을 몇 번이나 잡아 내렸다. 빌어먹을 옷, 날 밝으면 바로 투기 확정이다. 흉통 부분과 소매에서 살벌하게 실밥 뜯기는 소리가 났다. 차의재가 다시 입기엔 무리일 것이고, 사영도 이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생각은 없다. 갑갑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겠다.
이사영은 서원병원의 조용하고 어두운 제 방과 침대와 이불과 선풍기가 그립고 숙면이 그리웠다. 푹 잔 게 언제 일인지 기억도 안 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건만, 사영은 천성이 심히 예민한 인간이라 그런지 무뎌지는 속도가 한참 더뎠다.
이 불편한 생활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로는, 꿈에 더 이상 ‘그 사람‘이 나오지 않는단 것. 자연히 얕게 자는 이사영이 꾸는 꿈은 대체로 차의재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악몽의 소재도 기껏해야 그가 밖에 나가 담배 8갑을 한 자리에서 다 피우고 돌아오는 정도다. 그 꿈 얘기를 해줬더니 의재는 뭐 이딴 게 다 있냐는 눈으로 쳐다보며, 그 정도로 피워본 적은 인생 통틀어서 단 한 번도 없다고 일갈했다.
사영은 이 하찮은 현재가 마음에 들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점칠 된 제 음울한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데 성공한 느낌이 들어 만족스러웠다.
오늘 꿈을 꾼다면, 아마 차의재가 저를 끌어안아 압사시키는 꿈 아닐까. 이리저리 뒤척이는 둥근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리고 누웠다. 딱히 악몽은 아니라고 하면, 또 질색하려나.
처음부터 그랬다.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여자아이, 복도에 울려 퍼지는 손뼉 소리, 벽에 등을 기댄 채 쪼그려 앉아있던 남자. 이사영은 그때 보았던 차의재의 모든 부분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사영의 온 세상이 그를 주목했었다. 누구는 그걸 한눈에 반한 거라고 말한더란다. 이사영은 그딴 얄팍한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랑, 그 단어가 가벼울 정도로 폭력적인 경험이었다.
액면가로 봐서는 저랑 엇비슷한 주제에 멍 좀 때렸다고 말 까는 성질머리, 대책 없는 성격, 저에게만 가시 돋은 태도까지 전부 거슬리고 신경 쓰였다. 그런데도 이사영은 차의재가 좋았다. 이유 없이, 거의 맹목적으로.
세상에 이유가 없는 게 있나……
시야를 부옇게 메운 달빛 사이로 상념이 흐느적거린다. 당신 곁에서 잠들어서, 꿈에서도 당신을 보면, 내 인생에 온통 당신이 있는 거겠지. 삶이 아예 뒤집어 엎어진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평화롭고 익숙하지 않나? 이사영이 느끼는 불편함이란 기껏해야 잠자리가 불편한 것밖에 없었다. 마치 아무런 격변도 없었던 것처럼.
부유하던 상념이 꾸물꾸물 입을 열었다. 끈적한 점액에서 거품이 터지듯 느리고 둔탁한 파열음이 난다. 입 모양은 분명 어떤 문장을 구사하는 것 같은데, 귀는 마땅한 청각적 정보를 얻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무력감에 이사영은 무심코 짜증스레 말했다. 형, 울지 말고 말을 해요. 제 소매를 붙잡은 손이 경련한다. 왜 팔뚝을 쥐지 않고 애먼 옷자락을 쥐어. 당신은 늘 내게 손대기를 꺼린다. 꺼려? 그게 아니지. 당신은 내게 손대는 걸 두려워한다. 두 손을 틈 없이 모아 연약한 것을 대하듯 플라스틱 덩어리를 받쳐들었던 때처럼, 당신은 나를 몹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진다.
당신은 여전히 울고 있다. 당신은 꽤 자주 울었다. 눈물을 만져본 적은 없다. 울음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그냥, 당신이 슬픈 게 느껴졌다. 이사영은 그에 한해서는 관찰력이 매우 뛰어났고, 당신은 알기 쉬운 사람이니까. 머리 좀 굳는다고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상념은 계속해서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는 거야. 사영은 반쯤 체념한 채 흘러내리는 슬픔을 가만 보다가, 상체를 숙였다. 연신 먹먹한 물거품 소리를 내던 입술이 제 안에 들어오자 비로소 사람의 음성을 냈다.
형이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건 분명, 차의재의 목소리였다.
동행
차의재는 아침마다 어제의 일기를 썼다. 기억나는 건, 낭만 운운하며 꼽을 주던 이사영의 목소리다. 차 주인이 앞 유리에 썬팅을 한 건지, 만 건지, 아침햇살이 다 투과되는 걸 보면 간밤에 별 구경은 끝내주게 했겠네. 의재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상태로 얼굴을 쓸어올렸다. 툭, 팔꿈치가 탄탄한 직물에 부딪힌다.
“아, 미안.”
의재는 반사적으로 내뱉는 동시에 눈을 번쩍 뜨고 옆을 확인했다. 새끼, 안 그래도 잠 제대로 못 잤을 텐데 깨웠다고 지랄하는 거 아냐? 졸려 보이면 밖에서 천 덮어주고 더 자라고 해야지. 아무리 제게 관대하다 한들 천성이 쌈닭인 놈이다. 되도록 화를 돋우고 싶지 않았다.
조수석에는 아무도 없다.
의재는 뒷좌석을 확인했다. 배낭 두 개. 그럴 리 없다. 뭐가 그럴 리 없냐면, 사람 상반신만 한 배낭을 저 혼자 두 개 매고 왔을 리가 없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사영은 분명 여기 있었다.
산책이라도 갔나? 말도 없이? 의재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다. 없다. 뭔가, 나 잠깐 어디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표시가 하나도 없다. 그럴 놈이 아닌데.
사실 의재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영원히 같이 있어 줄 것처럼 굴던 상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 말이다. 차의재는 자주 이런 식으로 버려졌다.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제 곁에서 사라진 게 오로지 사람뿐이라는 것.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그의 손에 남아있었다. 차에 살림 차리란 것도 아니고, 짐 줄이라고 잔소리한 건 지였으면서 이걸 왜 다 두고 가…….
“약간은 고마워해 줬으면 해서?”
뭐, 깡 있다고 칭찬이라도 해줄까. 다 두고 가줘서 고맙다고 너한테 인사라도 해야 하냐?
“그럼 그냥 가요.”
“괘씸한 새끼. 누구 좋으라고? 다 들고 갈 거야.”
의재는 배낭에서 필요한 짐을 막힘 없이 솎아냈다. 앞으로 한동안 사람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 다닐 예정이니까 식량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 이사영 옷은 사이즈가 안 맞으니까 두고 가고. 호신용품도, 저한테는 사실 있어 봐야 짐밖에 안 되는 물건이다. 정리가 끝나자 두고 갈 게 들고 갈 것보다 많았다.
차의재는 차 트렁크에 배낭을 올려두고 담배를 깠다. 굳은살 박인 엄지 끝이 라이터에 불씨를 튀겼다. 이로 문 담배 끝이 무르게 짓눌리고, 입술 새로 연기가 뿜어나왔다.
“난 담배 냄새 싫어요.”
“싫으면 뺏어보던가.”
필터 끄트머리까지 불이 왔다.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사람은커녕 좀비 그림자도 안 보인다. 고속도로 양옆을 감싸는 낮은 산등성이로부터 나뭇잎 마찰하는 소리만 무성하게 들려왔다.
의재는 불도 안 끈 꽁초를 발치에 버려두고 한 개비 더 불을 붙였다. 아스팔트 길에서 불이 붙겠냐. 차라리 정말로 차에 붙이 붙어서 터져버리면 속이 후련할 것 같다.
근래에는 이사영도 나오는 쓰레기를 눈 안 닿는 곳 아무 데나 갖다버리곤 했다. 언어도 욕부터 배우는 게 쉽다는데, 같이 사는 와중에 나쁜 버릇부터 옮는 게 당연하겠지. 알긴 아는데, 차의재는 이사영이 저처럼 갈 곳 없는 사람의 꼴을 하는 게 못내 신경 쓰였다.
이사영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고 가족 비슷한 사람들도 있다. 여름만 되면 끈 떨어진 뒤웅박처럼 외로이 떠나야 하는 자신과는 엄연히 처지가 다르다. 서원병원이 싫어서 떠난 것이었으니, 그곳이 그리워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사영에게는 그곳이 어울린다. 그의 인생이 거기 있었다. 이렇게 얄팍한 충동으로 박차고 나와 노숙이나 하며 살 이유가 하등 없다. 오히려 그래서는 안 된다. 차의재가 결국 이 길을 걸어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처럼.
과거에는 미래를 바칠 가치가 있는가? 예로는 차의재의 알맹이 없는 추억과 앞으로의 인생 같은 것. 의재는 그 과거로부터 소년이란 존재가 사라지면 무엇이 남는가를 셈해본다. 놀랍도록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차의재가 살아있었다, 이 정도밖에는.
시간이 모든 걸 낫게 한다고는 하지만, 몸에 남은 흉처럼 인생의 어떤 상처는 결코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그런 송곳 같은 기억은 하나쯤 있다. 아무리 잘 여며 보관해두어도, 뾰족한 끝이 뚫고 나와 손을 찌르는 그런 기억 말이다.
차의재는 이 여름이 스러지지 않을 가시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바닥에 죽은 담배꽁초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어쩌면 이사영이 꾼 그 괴상한 꿈은 예지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차의재가 담배 한 갑을 다 피도록 이사영은 돌아오지 않았다.
“끝이에요?”
이렇게 떠날 거면 그때 갔어야지. 차의재는 그 순간 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총 한 발 맞고 죽은 척이라도 할 생각으로 보여줬다. 이사영이 그 순간 떠났더라면, 역시 그렇지, 하고 한결 수월하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겠지.
“끝이지, 그럼.”
“어디로 가는데요?”
나를 살게 할 곳으로.
차의재는 내려놓았던 배낭을 짊어지고 걸음을 뗐다. 발소리가 들린다.
*
이사영에게 기다림이란 지긋지긋한 동시에, 영원히 발 묶여있을 듯 가까운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좋아 8년이지 사실상 이사영의 인생 전부였다.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은 그간의 인생 전부가 헛되었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 이사영은 서원병원을 나와서도, 그리고 이만큼 멀어져도 마음은 언제나 그것에 한 발을 걸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말끔히 잊고 있다가도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다.
이사영은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자아를 가진 자신을 움직이는 시체와 다름없이 하잘것없는 존재로 만드는 그 사람이, 원망 한 점 없이 궁금하기만 했다.
사영아. 과거는 과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찾냐, 응? 살다가 만나면 알아볼 수는 있겠지. 그치만 억지로 찾는다고 해서 찾아질 일은 아니야. 이만하면 오래 찾았어. 네 인생 살아야지.
대판 싸울 각오를 하고 한 말이렷다. 그렇지만 이사영은 차마 그렇게 말하는 배원우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껄이면 몰라. 이제껏 자신이 하겠단 일이라면 뭐든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던 원우가 그렇게 말하니,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질책과 욕을 다 포함해도 그 말이 가장 아팠다.
과거에는 미래를 바칠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배원우의 말대로 과거는 과거에 불과하다. 문제는, 사영에게 그것은 과거가 아니란 점이다. 당신을 찾아 붙잡기 전까지는 완결되지 않는다. 이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8년, 그 시간이 우스울 정도로 더 길게 앞으로의 인생이 뻗어있었으며 사영은 자신의 집착이 그 전부를 제물 삼아서라도 연명하리라 확신했다.
이사영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당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 매여있었다.
사영은 다시 보자던 당신의 힘없는 목소리와, 그런 당신 눈동자에 어렴풋이 어려 있던 체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나를 잃는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조차 싫다. 나라는 안개가 당신의 인생에 자욱하게 내려앉아, 덜어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이 스몄으면 했다.
차의재의 옆자리는 무척 가지기 쉬운 것이다. 당신을 비난하지 않고, 당신을 떠나지 않는 것만으로 당신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이 동행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이사영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사영은 차의재와의 관계에서 통제력을 실감해본 적이 없었다. 차의재가 그렇게나 알기 쉽고 뻔한 사람인데도 그랬다.
아마도, 단순히 같이 걷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차의재가 주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있으니 주도권을 쥐지 못하는 것이다. 이사영이 차의재에게서 아직 얻어내지 못한 것, 이를테면 그의 모든 과거, 목표, 계기나 욕망, 꿈 같은 것.
사람이 사람의 꿈이 되는 게 가능한가? 적어도 이사영에게는 가능했다. 한 개인을 인생의 목표로, 무언가의 계기로, 욕망의 대상으로, 꿈 자체로 삼는 게 이사영에게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차의재에게도 바라게 되는 것이다.
나를 끌어안은 품에서 나던 겨울의 향은 없어도, 당신 슬픔이 눈물이 되어 추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이 그때처럼 나를 기다려줬으면 했다. 내가 당신을 좇아 정처 없이 헤매었다가, 당신에게 돌아왔던 그 아침처럼. 이사영이 본 차의재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오롯이 혼자가 된 당신을 보니 알겠다. 그날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상실이 너무나 커서 움직일 수 없었던 거다. 당신은 어딘가에 발이 매여 멈춰 설 사람이 아니다. 삶을 위해 삶을 견디는 것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기에 지금까지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거겠지.
그런 사람이니까, 살아서 내게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이사영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당신을 미워할 수 없다.
기다리는 건 내 몫으로 미뤄도 괜찮다. 나는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다. 당신은 어디까지나 다정하고 온화한 일만 겪었으면 했다.
“혼자 어디 가요?”
“……너는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누굴 좀 찾느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차의재의 시선이 한순간 힘을 잃었다. 워커 밑창으로 아직 벌건 불씨가 남은 꽁초를 지르밟던 사영이 틈을 놓치지 않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고민을 하느라 혼자 이걸 다 피웠어요?”
“…금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좀 달려봤다, 왜.”
“담배 끊게요? 갑자기?”
“어.”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고작 담배 때문에 당신이랑 같이 있기 싫단 생각은 안 해요.”
“끊는다고 할 때 좋게 응원해라, 매일 나가서 한 갑씩 피워대기 전에.”
“나가서 피울 바에는 옆에서 피우라니까.”
그제야 차의재의 얼굴에서 그늘이 한 겹 가셨다.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낸 그가 손을 쭉 뻗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 두어 번 스쳤다가 떨어진다.
“그래서, 찾았어?”
이사영은 차의재의 눈에서 불안을 읽어냈다. 눈 밑을 약하게 찡그려 웃는 얼굴이다.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내가 그 사람을 찾으면, 당신을 떠날까 봐서? 그렇지만 나는 이미 당신에게 돌아왔는데.
이사영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서원병원에 와서 한참을 머무르다가, 미련을 털고 떠나는 뒷모습들을 볼 때, 속에서 무언가 조용히 타들어 가곤 했다. 버려진 듯한 느낌,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무언가에 대한 상실감, 불합리한 배신감.
동류라고 생각했던 이가 나를 두고 자신만의 인생을 마저 쓰러 가면, 멈춰있는 자신이 평소보다 배로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이 지금 딱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 사영은 유난히 가족이란 말을 애틋하게 여기던 차의재를 떠올린다.
당신도 나를 꿈꾸었을까?
“글쎄요.”
부정도 긍정도 아닌 그 애매한 대답에도 차의재는 되묻지 않았다. 무서웠겠지, 내가 정말로 당신을 두고 훌쩍 앞에 선 걸까 봐.
이사영은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차의재는 초여름이면 그곳에 갔다. 사이트가 늘어선 평탄한 평지 옆으로 낮은 경사로 내어진 비탈 너머 제법 큰 연못이 있었다. 사람 손이 오랫동안 닿지 않아 수면을 빼곡하게 메운 개구리밥과 무성하게 자라난 갈대, 연둣빛 수면 위로 머리칼을 치렁치렁 늘어트린 거대한 버드나무가 자라 있다. 날이 꿉꿉해지고, 장마가 비를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곰팡이가 폈다. 그래서 의재는 매년 여름을 그곳에서 시작한다. 장마가 다 가고 나면 청소를 한 번 쭉 해주고,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으면 공간은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 8번의 여름 동안, 이곳은 지독할 정도로 똑같은 풍경이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그 시절의 생각이 났다. 시도 때도 없이 소낙비처럼 덮쳐오는 우울감에 일일이 반항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라, 차의재는 이곳에서 머무를 때면 그냥 모든 걸 받아들였다. 추억인지 환상인지 모를 기억을 더듬으며 과거를 복기하는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형, 눈.”
“혼자 잘하잖아.”
“내 손으로 관리할 거면 형한테 안 알려줬지.”
“아이 씨, 이리 대.”
차의재는 냉큼 몸을 일으켰다. 하여간 눈치는 뒤지게 빨라선, 사람이 감성에 젖어있을 틈을 안 준다. 처음에는 타이밍이 우연히 맞나 싶었는데, 틀렸다. 이사영은 차의재가 추억팔이 좀 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별의별 핑계로 그를 현실로 끌고 왔다. 물론 차의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찜찜할 뿐이지.
사영은 제 다리 사이에 앉은 의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자세가 좀 묘하지 않나. 한 번 접어도 긴 다리를 남의 허벅지 위에 얹는 게 퍽 자연스럽다. 옛날에도 이런 자세로 제 눈을 관리해줬던 건가? 남의 품에 들어오는 게 스스럼이 없다.
“형, 이거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해준 적 있죠?”
사영은 별 기대 없이 물었다. 입만 열면 구라 치기 바쁜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친 덫에 걸려줄 리가 없지.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입술이 대발 튀어나온 얼굴을 좀 풀어줄 겸 말을 걸었을 뿐이다.
“있으면, 왜.”
사영이 볼 수 있는 건 가르마가 잘 정돈된 정수리밖에 없었다. 차의재의 손에 들린 게 진짜 눈이었다면, 저를 살살 문지르고 지나가는 새하얀 거즈 사이로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겠지. 많이 바라지 않았다. 바로 지금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하는지 모르겠다.
“누구요?”
“있었어.”
“누가요.”
어떤 대단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 주변이 온통 그 애로 가득 차니, 입으로 소리 내어 뱉는 게 비교적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사영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쌓인 것도 한몫했다. 뜨겁고 눅눅한 공기를 못 이기고 웃옷을 반쯤 벗어놓고 있어도, 사영은 기껏해야 희롱 비슷한 발언이나 할 뿐이지, 그 밑으로 드러나는 자국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굴었다. 편안한 생활이 지속되자 자연스레 긴장감이 풀렸다.
“여기서 같이 살던 애.”
“언제요?”
“그만 캐 물어보고 얼굴 대.”
잘못 쥐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럽게 굴던 때가 얼마나 됐다고, 차의재는 거침없이 이사영의 뺨을 붙잡고 끌어와서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빼곡하게 돋아난 긴 속눈썹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손끝을 간지럽혔다. 살살 문지르고 지나가는 손가락 사이로 보랏빛 동공이 저를 고스란히 비춰내고 있었다.
“이거 중요한데.”
얘 눈이 왜 이래? 방금 닦아줬는데. 저가 뭔갈 잘못했나 의심하기엔, 양쪽 다 눈빛이 이상하다. 평소에도 사람 씹어 삼킬 것 같은 시선이 오늘따라 배는 집요하고 깊었다. 더위를 먹었나, 이게. 요즘 장난 아니게 덥긴 했어…….
“8년 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리가 들려오자 머리가 하얗게 굳었다. 5년, 10년 단위도 아니고 이 애매하고 정확한 숫자는 뭐야?
“그냥, 찍어 봤어요. 나한테 의미 있는 숫자거든.”
“……왜?”
“올해로 딱 8년 되거든요, 서원병원에서 지낸 게.”
배원우는 우스갯소리로 8살 먹었다고 그랬다. 생일도 병원 처음 온 날로 새는데, 당연히 생일 샌 만큼 나이를 먹은 거 아니냐며. 이사영이 저가 생일 축하도 못 받고 자랄 만큼 불우한 아이였을 것 같냐며 빈정대자 그런 말은 쏙 들어갔다.
차의재는 여전히 굳어있었다. 시선의 끝이 흐릿하다.
“형한테는 여기가 왜 의미 있는 곳이에요?”
큼지막한 손이 허리를 둘러 안아 끌어당겼다. 평소 같으면 또 무슨 개수작이며 즉시 떨쳐냈을 텐데, 사고가 멈춰서 그런 간단한 행위조차 불가능했다. 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인 의재가 힘겹게 머리를 굴렸다.
차의재가 소년을 서원병원 앞에 데려다준 건 8년 전, 이사영이 그곳에서 눈을 뜬 것도 8년 전의 일이다. 그렇지만, 남우진이 말하길 잘 치료해서 보호소로 보냈을 거랬는데. 굳이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면서.
아니, 이사영은 그곳을 떠날 수 없다. 서원병원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제대로 된 단서도 없는 누군가를 찾겠답시고 고집스럽게 그곳에서 버티던 애였다. 차의재를 따라 나가겠다고 하자, 너 미친 거 아니냐고 되묻는 말이 돌아올 정도로, 이사영은 한평생 그곳을 떠나길 거부했다. 남우진은 성깔 더럽고 예의 없는 이사영이 서원병원에 머무르는 걸 원치 않았겠지만, 그에게는 이사영을 내쫓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니지?”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이사영이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짙은 만족감이 드러나는 미소가 차의재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닐 리가.”
이사영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데 온 인생을 바친 것, 이사영이 서원병원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사영이 그곳을 나올 수 있었던 것- 그 모든 이유가 차의재, 그였다.
끈적한 단내가 온몸을 덮쳤다. 목덜미에 기대오는 머리칼은 부드럽고, 살결을 스쳐 지나가는 숨결은 따뜻하다. 그의 추억이며 꿈, 환상이 여기에 살아 움직이는 사람으로서 실존했다.
“개소리를 하네……. 내가 정말로 억지로 끌려다녔으면, 당신이 좋아서 8년씩이나 기다려줬겠어요?”
적어도 차의재가 생각한 재회는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부둥켜안고 있기도 잠시였다. 등을 쓸어올리는 손길이며 자꾸만 끌어당겨 밀착시키는 손길이 대놓고 음흉해서 벗어났더니, 당신은 나한테 그렇고 그런 마음은 하나도 안 드냐, 당신 외로움만 해소하면 끝이냐, 하는 말로 시작해서, 그래서 당신 도대체 왜 나만 달랑 두고 튀었냐까지 책이 잡혔다. 차라리 야하게 더듬어지는 편이 나을 뻔했다.
“기억도 안 난다면서. 내가 좋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럼 내가 당신 돌아오면 죽이려고 기다렸을까 봐?”
“아니, 그랬다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은 거지.”
“그러니까 지금 형 말은, 내가 당신을 끔찍이 미워할 수도 있다?”
네 하는 꼴을 봐라,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안 보인다. 좀 전에 은근슬쩍 입술 비빈 쇄골께가 아직도 화끈거리는데 무슨. 차의재가 열이 오른 살갗을 쓸어내리는 와중에, 버튼이 제대로 눌린 이사영은 서원병원 대표 쌈닭의 성질머리를 여실히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지금까지 내가 형 따라다닌 건 킬각 재는 거였나 봐. 모골이 송연했겠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왜. 다쳐도 금방 나으니까? 총 몇 발은 맞아줄 수 있지,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어요?”
그 말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서 처음 자국을 드러낼 때, 차의재는 당연히 부정적인 반응을 염두했다. 빈정대고, 비난하고, 적대하고, 끝내 등을 돌리는 그의 모습까지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졌으나, 그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다정함에 몸을 맡겼을 뿐이다.
마지막 물음표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사영은 지친 듯 벽에 가만히 등을 기댔다. 화마저 다 가신 무표정으로 시선을 저 멀리 던진 채, 한숨처럼 읊조린다.
“씨발……”
좆 됐다. 불길한 감이 의재의 등골을 섬뜩하게 타고 올랐다. 아니, 오해를 푼 지 1시간도 채 안 돼서 개같이 싸운다고? 서로 누군지 몰랐을 적에도 이 정도로 빡친 적은 없었는데?
“사영아, 형이 미안해.”
아, 이럴 때만 이름 부르지 말랬는데. 그렇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이 없다. 의재는 고개를 돌린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걸 안아, 말아? 먼저 끌어안았다가 입이라도 맞춰오면 어떡하나. 지금 분위기로는 밀어낼 수도 없는데. 차라리 이 기회에 눈 딱 감고 키스해봐? 이쯤 되면 자기 자신에게 신뢰 한 줌 허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손가락도 안 물었는데, 혀라고 물겠냐.
이사영은 온갖 번뇌에 휩싸인 차의재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씹어뱉듯 물었다.
“뭐가 미안한데요?”
“…….”
대답할 수 없었다. 네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굴기에 아무렇게나 뱉은 사과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이사영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느리게 심호흡하다가, 아주 당연한 것을 가르치는 어조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한테 미안할 게 있다면…… 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거. 그거밖에 없어요.”
사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싸운 후에 제 방으로 들어가서 머리를 식히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집이라기엔 열악한 캠핑장 관리실에는 분리된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차의재는 따로 들어갈 곳 없이 바깥방에 남겨졌다.
솔직히, 좀 억울하다. 차의재는 이사영에 대해 충분히 많이 고민했다. 이 새끼가 나랑 하고 싶은 게 가출이냐, 연애이냐, 하는 류의 것이어서 그렇지. 그의 지적은 아마, 저를 두고 가겠다는 황당한 결론이 어쩌다 나왔느냐는 질책에 가까울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정신이었고 기억마저 멀쩡했는데, 둘 다 해당하지 못하는 이사영이 먼저 알아보고 기다려주기까지 했으니 의재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돌아보면 꽤 많은 단서가 있었다. 의안이 대신한 오른쪽 눈도, 서원병원에 8년 머물렀다는 말도, 남자애이고, 자신을 따라다니고, 차의재의 인생에 그런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왜 몰라봤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든다.
그러나,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의재가 소년과의 추억을 맴돌며 살아온 것은 맞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무의식적인 행위였다. 8년 내내 그를 곱씹으며 살아왔다면 마음에 멍이 들었을 것이다. 외면하고 삼키는 것이 훨씬 익숙했다.
보잘것없는 변명 한마디 더 붙이자면, 이사영과 소년의 이미지가 심히 다르단 것도 한몫했다. 그에게 있어 소년은 가족이었고, 사영은……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지금 듣게. 할 일도 없는데.”
사영의 눈은, 그랬다. 저를 집어삼킬 것처럼 위압적이고, 숨 막히게 달큰하다. 차의재는 그의 기저에 깔린 욕망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대놓고 껄떡대는데 몰라볼 수가 있나. 그에게 있어 이사영은, 그 정도만 다를 뿐 언제나 성애적 관계의 선에 자리했다. 비유하자면 소년과 이사영은 고양이와 토성 정도의 차이가 난다. 비교 선상에 놓이는 게 아예 불가능한 존재들이었다.
소년이 자신을 미워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어쨌거나 자아 없는 그를 저 좋을 대로 가족이라며 데리고 산 것은 저였으니까. 그러나 이사영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괘씸하다. 갖은 예쁜 짓 다 해가며 사람을 홀려놓고 지금 와서 마음이 식었다고 그러면 그만이야? 내가 자기 손가락 겁 없이 입안에 들이밀 때도 안 물고 버텨줬는데, 이 정도 노력했으면 한 번은 더 기회를 줄 수 있잖아. 우리 사이에 그 정도의 신뢰는 쌓였어야지.
바닥에 한참 뻗어있던 차의재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자리를 옮겼다. 차갑던 바닥이 미지근하고 눅눅해졌다. 선풍기 바람이 쐬고 싶은데, 집에 꼴랑 하나 있는 발전기 코드와 선풍기는 이사영이 들어간 방 안에 있다. 비열한 자식. 사과 안 할 거면 여기서 쪄 죽으란 거지.
의재는 끝내 몸을 일으켰다. 고민은 무슨. 날이 이렇게 더운데 땅 파고 있다간 열사병 걸리기에 십상이다. 의재는 일단 사영이 차지한 선풍기부터 뺏기로 했다. 더워서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호소하면 문전박대는 안 하겠지.
사람의 이성은 생각만큼 강인하거나 숭고하지 않다. 그것이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경우가 많아서 쉽게들 오해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나약한 독재자에 불과하다. 겨우 다시 만난 애틋한 이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 더위 핑계나 대며 방문 앞에 서는 것은, 오로지 차의재 본인을 위한 선택이다. 그 겨울에도 그러했다.
정말 가족처럼 여겼다면, 믿어줬어야지. 믿지는 못해도 상처받을 각오를 하고 곁에 있어 줬어야지. 가족 운운하면서 정작 먼저 선을 그은 사람은 차의재였다. 그날의 결정에 소년을 위한 고민은 하나도 없었다. 당장 내일의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에 매몰되어 너를 신경 쓸 여유는 하나도 없었다.
발바닥을 떼자, 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살갗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더라. 이만하면 충분히 고민한 티가 나겠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라고 사과할지도 정했다.
그간 한 발짝만 삐끗해도 저를 죽일 듯이 달려들던 세상으로부터 살아남느라 저답지 않게 조심스레 굴긴 했지만, 차의재는 원래 정도만 골라 걷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사영 역시 제게 그리 가혹하지 않다. 내가 틀리면, 네가 답을 알려주겠지. 이제 말문도 트였잖아.
소년은 더 이상 인형이 아니다. 그건 언뜻 두려운 말 같기도 하다. 네가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고, 욕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를 떠나지 않고, 욕하지 않으리라 믿는 것. 인생을 같이 걷는다는 건 그런 거였다.
차의재는 방문을 두드렸다.
'헌조살 > 사영의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식품위생법 제2장 제8조 (1) | 2025.04.30 |
|---|---|
| Opacity 20% (0) | 2025.04.17 |
| ERROR: 102 (0) | 2025.03.21 |
| 인간 찬가의 시대 (1) | 2025.03.21 |
| D+3 (0) | 2025.03.21 |